후달이의 일기 - 단편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100%리얼!!
2012년 7월 13일... 금요일에 있었던 후달이의 일기입니다.


‘아~으~~ 출근하기 싫어!’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이불속에 묻혀진 몸뚱이를 더욱 일으키기 힘들게 만든다. 시원하게
들어차는 촉촉한 공기와 창을 미끄러져 내리는 빗물을 바라보면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이런 젠장 맞을... 아직까지 usb는 진주의 손에 있다. 그리고 화요일부터 바로 어제인 목요
일까지 없는 외근을 만들고 만들어 어떻게든 잘~ 지나갔다. 그러나 오늘이 문제였다. 더 이
상 갈 데도 없고 연차휴가는 반려를 받았다.
그 이유가 뭔지 아는가?
회식 때문이다. 그깟 회식이 대수랴... 남의 속도 모르고 반려를 내려주신 우리 멋쟁이 팀장
님이 정말 죽이고 싶을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직장인들... 정말 불쌍하다.
꼭 내가 직장인이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먹고 살겠다고 이런 상황에서도 울며 겨자먹기
로 출근을 해야한다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내리는 비만큼 내 마음도 울고 있다.

‘에잇 한 번 쪽팔리고 말지 뭐!’

쿨하다!
한 번 쪽팔리고 말 일이 아닌데도 쿨하다. 어쩌면 진주와 친한 여직원들 사이에 마케팅팀의
‘서대리’는 아주 능욕적인 야한 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되어 있을텐데도 쿨하다. 전혀 쿨하지
않은 내가 쿨한 척 하려니 그게 더 못마땅하다.

“아임 어 쏘 쿨!”

머리는 새집 짓고 눈은 퉁퉁 부어서 거울을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내 모습이 참으로
한심스럽다. 하지만 피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겠는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쿨하게
한 번 부딪쳐보자!

오늘도 늦었다. 그 여자가 늦은 게 아니라 오늘은 내가 늦었다. 아침부터 쿨한 남자네, 어쩌
네 하면서 생 지랄을 떨었는데 안 늦을 리가 있겠는가? 내 차가 다가서는 것을 보며 밤주먹
을 만들어 흔드는 그 여자가 보인다.

“야! 죽을래? 다리까지 빗물 다 튀었잖아!”

그러게 비오는데 무슨 패션쇼 한다고 치마를 입고 나오고 지랄이냐 지랄이! 38살 아줌마면
아줌마답게 입으셔야죠...

“죄송해요...”

“오늘은 나 때매 늦은 거 아니다...”

“알았어요~”

힘없이 대답해준다. 평소 같았으면 대답이 성의가 없다며 다그칠 여잔데 왠일인지 조용하
다. 조용하니 그게 더 불안하다.

사실 의도를 했건 하지 않았건 진주에게 그런 야하디 야한 글 따위를 보여준 건 엄연히 퇴
사감이다. 특히나 요즘 여자들이 어찌나 그런 쪽으로 민감한지 뉴스만 봐도 몰카 찍다 걸린
놈, 지하철에서 자지 디밀다가 동영상 찍힌 놈, 남의 집 옅보다가 들킨 놈... 한 둘이 아니지
않는가? 결국 남자들만의 다채롭고도 판타스틱한 성의 세계가 점점 압박을 받고 있는 게 아
닌가! 결국 나도 어쩌면 그런 불명예스러운 퇴장을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아직까지 전화 건 다른 연락선이건 별 다른 이야기들이 흘러나오지 않는다는 건 다행스러울
일이기도 했다.

“저기...”

“왜!”

헉! 이 신경질스럽고 짜증스런 반응은 뭐지? 진정으로 신경질을 부려야 할 사람은 난 데?

“차장님 오늘 좀 이상한데요? 왜 이렇게 기분이 다운이세요?”

“다운 아니야~”

“에이~ 완전 푹~~~ 가라앉았는데... 아니긴....”

“아니라면 아닌 줄 알아!”

뭐야... 이 여자... 오늘 그날인가? 아님 비가 와서 저기압인가? 그것도 아니면 남편이랑 싸
웠나? 제대로 못 눌러준다고? 캬캬캬캬캬

비가 제법 오는데도 불구하고 왠일인지 차는 막히지 않았다. 하긴 이런 날도 있어야지 매일
같이 막히면 정말 짜증나잖아? 상습정체구간도 수월하게 빠져나온 나의 애마는 빗길을 미끄
러지듯 달려 나간다. 혹시... 이 여자가 조용해서 그런가? 출근길이 왠지 낯설다. 항상 조잘
대며 떠들어대던 이 여자가 조용하니 세상이 조용한 것 같다.

‘앗싸~ 안 늦었다~~~~’

평소보다 훨씬 늦게 출발을 했는데도 도착 시간은 평소보다 빨랐다. 지각하지 않은 기쁨은
잠시 뒤로 하고 나는 커다란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냥 평소처럼 웃으면서 인사할까?’

‘아냐.. 아냐.. 괜히 말 못걸 게 인상이나 빡! 쓰고 들어갈까?’

‘아냐... 그것도 어색해... 아니면 아픈 척을 할까?’

갑자기 아픈 척이라니, 핑곗거리를 생각하는 잔머리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창의력이 떨어
지나보다. 어렸을 땐 그렇게도 잘 돌아가던 잔머리가 이젠 아예 돌아가지도 않는다.

“수고해~”

차에서 내리자마자 고미영은 정말 고미영스럽지 못하게 조용하고 진솔하게 말한다. 아~ 정
말 적응 안 된다. 차라리 괴롭힐 것이지... 이래서 사람은 함부로 변하면 안 되는가 보다.

“차장님!”

“응?”

“뭔지 모르겠지만 완전 안 어울리는 거 알죠?”

“어울리고 안어울리고가 어딨어!”

“진짜 안 어울리니까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시죠!”

“알았어~ 이따 보자~”

끝까지 폼만 잡다 들어가는 미영이 조금 걱정스럽다. 그만큼 평소와 너무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에이... 장난이라도 한 번 치고 들어가지...’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든다.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차갑게 돌아서는 미영을 보니 괜
스레 마음이 이상하다. 괴롭힐 땐 그렇게 싫더니 안 괴롭히니 또 그 괴롭힘이 그립기까지
하다. 인간이란 정말 알 수 없는 존재인가보다.

애써 띄워놓았던 마음이 그녀 덕분에 서서히 가라앉아 버린다. 결국 힘없이 아무런 표정 없
는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도착하기 얼마 전 어떻게 할까 고민했던 모든 것
들은 기억도 나지 않게 되었고 결국 평소보다는 조금 쳐진 모습으로 사무실로 들어선다.

“와우! 서대리! 왠일이야!”

저 녀석! 감자 팀장!! 뭐가 그리 들떴는지 아주 반갑게 반겨온다. 오호라... 오늘 회식이라고
벌써부터 들떠있는 거냐? 그저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리로 향한 나는 가방만 의자에 올려두
고 회의테이블로 가 앉는다. 그러자 하나 둘씩 직원들이 모여들더니 곧 각자의 자리에 앉아
조회를 할 준비를 해가고 있다.

왜 하필 너희들은 자리를 바꿨니? 의식하지 않는 척 해보지만 눈 앞에는 진주가 손을 아주
귀엽게 말아 쥔 채 수첩에 메모를 하고 있다.
귀엽다. 작은 저 손, 저 손에 잡힌 볼펜이 나의 그것이었... 헉!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원래 앞자리엔 다른 남자직원이 앉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왜 내 눈엔 진주의 모습이 보이
느냐 말이다. 쪽팔리게...

"자~ 조회 시작하자고!"

팀장의 말에 진주가 고개를 든다. 반짝이는 검은 생머리 한 올이 입술에 붙어 버린다. 예뻐
보이려고 일부러 그러니? 나머지 머릿칼은 전부 귀 뒤로 넘겨 버리면서도 그 한 가닥의 머
릿칼은 여전히 자홍빛 입술에 남아 있다.
조회라고 해봐야 별 거 없다. 어쩌면 그런 별 거 없는 게 굉장히 중요한 일일수도 있다. 서
로의 업무를 공유하고 알림으로써 협력체계가 갖춰지고 팀 내부사정에 의해 또 다시 해야
할 일들을 분배하는 과정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로써 이 시덥잖
은 조회라는 일정이 빨리 끝나기만 바랄 뿐이다. 눈길을 피하려고 해도 자꾸만 눈에 들어오
는 진주의 볼과 앙증맞게 작은 입술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수원점 담당... 서대리 너지!”

“예? 예에...”

조금 전까지 팀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온통 넋이 빠져 있는 상태에서 껍데기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일 뿐 영혼은 이미 내 몸을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왜 그래 서대리! 왜 멍을 잡고 있어?”

멍을 잡긴... 너도 내 상황 돼 봐! 썅!! 자칫 잘못했다간 개쪽 털리면서 회사도 관둬야 할 상
황인데 멍 안 잡게 생겼냐!!

“죄... 죄송합니다.”

“됐고! 너 오늘 수원점 좀 다녀와!”

“수원이요?”

아~ 장사도 제일 안 되고, 점주는 성격이 졸라 지랄 맞은데다 요구하는 건 엄청나게 많은
그 가맹점에 출장을 간다는 건, 어떻게 보면 벌이나 마찬가지였다. 신입 들어오자마자 뺑뺑
이를 돌리는... 한 마디로 좌천이나 다름없는 그 먼 곳을 다녀와야 한다는 게 짜증날 뿐이
다.

“왜? 싫어? 너 출장 좋아하잖아!”

오호라~
내가 며칠 진주를 피하느라 회사도 안 들어오고 출장 다닌 게 그리도 마음에 안 들으신 건
가? 쳇! 치사하다... 감자새꺄! 간다.. 가!

“알겠습니다. 다녀오죠 뭐~ 근데 무슨 일로~”

“거기 점주가 인테리어를 바꾸고 싶으시단다. 디자인 쪽 담당은 너니까 갔다 와!”

“제가... 왜.. 디.... 아... 알겠습니다.”

사실 디자인 담당으로 온 사람은 진주였다. 그녀도 좀 인생이 잘못 풀려 영업팀에서 썩어서
그렇지 대학 전공부터 입사 응시분야자체가 디자인팀이었다. 그러나 디자인 팀이 따로 없는
우리 회사 특성상 마케팅팀에서 디자인까지 맡고 있었고 진주가 입사할 당시엔 T.O가 없었
던 것이다.

“너 졸라 억울한가보다?”

드디어 터지셨습니다. 감자의 막말이...
명색이 연매출 700억 이상의 중견기업의 팀장님께서 그런 저렴한 말투를 쓰는 건 아니죠...
씹새야... 라고 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억울하긴요... 뭐 까라면 까야죠~”

그런데 이 인간, 내가 까불고 꼬운 티를 팍팍 내는데도 날 좋아한다. 그렇게 느껴진다. 그게
정말 이해가 안 된다.

“그치? 까라면 까야지? 가서 잘 들어주고 자를건 딱 자르고... 뭐... 그런 싸가지 없는 건 안
시켜도 잘하니까 걱정 안 해도 되지?”

“그럼요...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진주랑 같이 갔다 와! 가서 인사시키고 업무 좀 잘 알려주고... 이제 니가 사수해!”

허거덕! 호... 혼자 갈게요~~~ 제발....
팀장에게 말하려다 헛숨만 들이마신다. 살짜기 미소 띤 진주의 눈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가
혹하다. 인생이... 지금쯤 내 일기를 보는 분들은 그럴 줄 알았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전혀 예상도 못한 일이었다.

조회가 끝이 나고 자리로 돌아와 출장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뭐 준비라고 해봐야 서류철
몇 개와 디자인 매뉴얼 북 하나 챙기는 게 전부지만 진주와 함께 갈 여행길이 걱정되어 나
름 시간을 뻐기고 있는 중이다. 혹시 아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나 혼자 가게 될지....
그러나 그런 바람은 그저 나만의 바람일 뿐 바쁜 일은커녕 왜 빨리 안가냐고 재촉만하는 팀
장 덕분에 짜증만 이빠이 나고 있었다.

“저...기 대리님... 저도 뭐 챙길게 있을까요?”

아~ 진주야... 니가 진정 그 글을 보고야 말았구나....
평소엔 또랑또랑 말도 잘 하던 그녀였다. 발음도 좋고 목소리도 맑아 키만 조금 더 컸으면
아나운서 시험을 보라고 해 볼 만한 그녀였다. 공부가 좀 딸리려나? 어쨌든... 그런 그녀가
지금 내게 말을 걸며 더듬거린다. 왜 더듬거릴까? 내 글을 모조리 봤건 안 봤건 보지나 자
지 정도의 단어쯤은 읽어 봤겠지... 아마 너도 지금 나와 단둘이 떠나는 출장이 마냥 즐겁지
만은 않을거야... 그치?

“어... 없어... 다 챙겼으면 가.. 갈까?”

아... 난 또 왜 더듬냐... 차라리 당당했으면 더 나았을 것을... 쏘 쿨!! 쏘 쿨하자!! 아자!

진주와 나란히 앉아 고속도로를 달린다. 출발해서 몇 마디를 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
로 아주 시덥잖고 쓸데없는 대화였나보다. 가령 안전벨트를 매라는 말이나, 불편하면 의자
를 조금 젖히라는 것처럼 일회성 짙은 말들이었던 것 같다. 그 후로 진주와의 대화는 마치
싸운 연인처럼 단호하게 끊겨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진주는 연신 창밖을 바라보며 손가락
을 꼼지락거리고 있을뿐이다.

‘아~ 답답...하다!!’

차라리 혼자 가고 있다면 크게 음악을 틀어 놓고 목청 터져라 노래라도 따라 부르며 갈텐
데... 아니면 여기저기 전화해서 수다라도 떨며 갈텐데... 사생활의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성
격이라 그러지도 못하고 있다. 답답함에 커다랗게 숨을 몰아 쉬는 것 외엔 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넘게 쉬지도 않고 수원을 도착해서 가맹점엘 도착하자 진주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어디론가 급하게 달음질치기 시작한다. 아마도 소변이 무척이나 급했던 모양이
다. 뛰어가는 모양새나 얼굴빛은 오줌보가 터지기 일보직전의 모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긴... 두 시간 동안 그렇게 물을 홀짝대더니... 당연한 결과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케팅팀 서대리입니다. 이쪽은 김진주 주임이고요~”

진주가 나오자마자 더럽게 못생긴 점주에게 진주를 소개했다. 그냥 단순히 못생긴 게 아니
라 무척이나 쪼잔하면서도 짜증나게 생긴 스타일의 인상이다. 이그... 저런 얼굴로 손님을
맞으니 당연히 장사가 안 되지... 차라리 좀 웃어라!

괜한 소리가 아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얼굴도 서비스다. 여자들이 괜히 얼굴을 뜯어고치겠
는가? 자기만족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100% 믿지 않는다. 남자들에 대한 서비스 품목
을 업그레이드 시킨다고 생각하다는 거다. 물론 성형을 한 여자의 100%가 그렇지는 않다는
변명도 함께 해본다.

그러나 이 인간은 해도 너무한다. 나이는 나보다 젊은데 부모 잘 만난 덕에 점장님소리 들
으며 본사 직원을 오라가라 한다. 하긴 나도 서비스품목이다 보니 당연히 부르면 와야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돈 없고 빽 없으면 납작 엎드려 비위 맞춰야지... 근데 정말 기분이
나쁜 건 이 자식의 눈이 진주의 신체를 스캔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대 놓고 말이다. 그러
더니 한동안 진주의 불룩한 가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손을 내민다.

“아.. 안녕하세요... 진주씨라고 했나요?”

“아...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당장 놔라... 그 손.... 야! 김진주!! 넌 그렇다고 내민 손을 그렇게 덥썩 잡냐!!
아마 진주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는듯 하다. 이 인간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을 리 없지 않은
가! 괜히 벌어진 곳도 없는데 남방셔츠 위로 다소곳이 손을 얹으며 악수를 청한 그 인간에
게 살며시 고개를 수그려 인사를 하는 모습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아~ 점장님.. 그건 그렇고 뭘 바꾸고 싶으시다고...”

1초라도 그 인간에게서 진주를 지켜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충 인사가 끝남과 동시에 진
주의 팔을 잡아끌어 내 뒤로 숨긴다. 캬~ 이 기사도 정신! 진주의 구두 굽소리가 바닥의 대
리석과 마찰을 일으키며 경쾌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를 보지 않다도 느낄 수 있다. 이 인
간의 참지 못 할 응흄한 시선에서 자신을 지켜줘 고맙다는 표정을...

“아~ 그게... 메뉴판이 너무 작아서 손님들이 보기 힘들다고 하고, 저 쪽에 테이블을 없애고
전부 단체석으로 바꾸고 싶고......”

이러쿵 저러쿵 말은 어찌나 많은지... 요구사항은 차라리 매장을 새로 오픈하는 게 나을 듯
싶고, 바라는 건 더럽게도 많은 인간이다. 진주도 처음엔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을 해주는
가 싶더니 곧 지쳐가는 기색이 역력해지고 있다.

“점장님, 메뉴판은 좀 더 크게 제작해드리겠습니다만, 나머지 요구하시는 것들은 사실 비용
을 떠나서 저희 가맹점 매뉴얼에 너무 어긋나는 것들이라서 불가할 것 같습니다.”

“아니, 본사가 하라는대로 하는데도 이 모양 이 꼴인데... 장사 안 되서 까지는 거 본사가
책임질건가요?”

너...너... 내가 또 그 말 할 줄 알았다. 우리가 시키는대로 다 했다고? 매일같이 판촉활동
했냐? 주력 메뉴 늬들이 우겨서 바꿨지? 주차장 있어야 한다고 했더니 그것도 우겨서 주차
장자리에 데크깔고 테이블 놨지? 그래서 벌금 먹었지? 아직도 안 치웠더라? 그리고 옆 공영
주차장이랑 계약해서 주차공간 확보하랬더니 그것도 안했지? 조금 더 남겨먹겠다고 중량 속
여 팔다가 카파라치한테 걸렸지? 레시피 마음대로 바꿔서 더 이상 지원 및 보조 못한다고
했더니 싹싹빌어서 한 번 봐줬지? 주방장 그만 뒀다고 해서 오픈팀 다시 가서 무료로 재오
픈 행사 도와줬지? 인간아... 내가 할 말 다하려면 오늘 이 글을 보는 분들한테 올릴 분량 다
써야할 거 같아서 참는다.

“저희는... 최대한 영업하시는데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것은 해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노력의 결과가 이거냐고”

엇쭈.. 너 슬슬 말을 놓는다... 어린노무새끼가 그냥.... 형도 화 낼 줄 알아... 형도 화나면 제
법 무섭다~
요즘 이래저래 무척이나 예민해진 상태인 것을 알고 있는 바 이를 갈면서도 실수를 하지 않
겠다는 일념하에 겨우겨우 화를 참아가고 있다.

“우선 차근차근 해 나가도록 해보죠.. 저희도 점장님 매장이 최대한 잘 될 수 있도록 방법
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당신 오기전엔 머리까진 이상한 아저씨오고 그 아저씨 이전엔
사기꾼 같이 다해준다고 하던 사람 오고... 지금 담당이 몇 번 바뀌었는지 알아? 오늘 보아
하니까 당신도 빠지고 저 여자한테 맡기려고 하나본데...”

“말씀이 좀 지나치십니다?”

어이구... 이러면 안 되는데... 나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이대로 잘리면 안 되는
데......

“뭐? 지나쳐? 야! 눈알이 있으면 한 번 봐~ 점심시간 거의 다 됐는데 파리 날리고 있잖아!
월 500이상은 장담한다며?”

네... 네... 그렇게 말씀 드렸었죠... 씨발놈아! 우리 감자님이 그렇게 말씀드렸더랬죠...
저도 이렇게 좋은 상권에, 이렇게 좋은 자리가 이렇게 장사 안 되는 것도 신기할 따름입니
다. 오늘 또 하나를 배운다. 남 탓을 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되돌아볼 필요가 분명히 있다
는 것을...

“왜 대답 안 해? 할 말이 없겠지?”

“아뇨,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 겁니다.”

분위기는 점점 험악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별로 놀랍지도 않다. 뭐 이러다가 결국 내가
사과를 하게 될 거고 이 인간은 본사에 일러 바칠테지... 그러면서 원하는 것 하나를 요구를
할테고 감자는 정중히 거절하며 다른 떡을 하나 내밀거야... 그리고 이 인간은 그 떡을 얼른
주머니속으로 숨길테고... 난 사무실 들어가서 잠깐 욕을 먹으면 되는 시나리오지... 근데 팀
장이 한번만 더 싸우면 확 잘라버린다고 진심으로 말했는데...... 에잇 모르겠다.

“뭐? 어이가 없어?”

“솔직히 말하죠, 점장님 마인드부터 고치셔야 할 것 같네요.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댄데 손님
들한테 사기를 칩니까? 옛날에도 먹히지 않던 사기를...”

“뭐? 사기?”

“예! 사기요!! 중량 속이고, 원재료 속이고... 본사에서 납품되는 원재료하고 점장님 점포에
서 팔려나가는 개수하고 따져보면 원재료도 싼 거 갖다 쓰시는 거 다 압니다. 또, 원재료
원산지도 지금 다 속이고 있는 거 저희 수퍼바이저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수시로 체크하는
거 모르시죠? 요즘 주차공간 없이 장사하는 집이 몇이나 됩니까? 주차문제 시급히 해결하시
라고 말씀드렸죠? 서비스 교육도 마찬가지, 직원들 보낼 게 아니라 점장님부터 다시 하셔야
겠네요”

진주의 눈이 동그래진다. 동시에 겁에 질렸던 표정은 풀리고 체증이 풀려나가는지 시원하다
는 표정을 지어낸다. 반면에 얼굴이 붉게 변한 점장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눈빛
이었다. 아니다. 또 다른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거겠지... 내가 한 두 번 당하냐... 이쯤에서
우리는 돌아서는 일만 남은거다. 최소한 오늘만큼은 너란 인간에게 고개숙여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까.

“요구사항 있으시면 본사로 전화로 하십시오. 저희는 다음 스케줄 때문에 먼저 가보겠습니
다.”

수원점은 사실 계약해지를 하기 위해 수순을 밟다가 이 인간이 사정을 해서 한 번 봐준 점
포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의 잘못을 고쳐보려 노력이라도 해 볼텐
데... 이 인간은 그런 게 없다. 물론 계약해지를 하게 되면 회사로서는 금전적으로 타격을
입기야 하겠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땐 오히려 이미지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에서였다.

“저... 저기 자... 잠까...”

우리를 부르는 그 인간을 뒤로하고 잽싸게 도망치듯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본사로 출발을 한
다. 어쩌면 잘릴지도 모르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무겁게 가속페달을 밟는다.

‘망했다. 다 망했어... 으~ 이 놈의 성질머리....’

불안하다. 이번엔 정말 잘릴 것 같다.
알고 있었다. 내가 참지 못하고 쌈박질을 할거 란 걸... 그렇다고 일부러 싸운 건 아니다. 괜
히 진주만 건드리지 않았다면 억지로 억지로 참아냈을거다. 그런데 이쯤에서 드는 궁금한
점 한 가지... 왜 내가 진주를 위해 쌈박질까지 해야 하나? 잘릴 생각까지 하면서?

“어으!”

짜증이 난다. 잘리건 잘리지 않건 그런 것들을 떠나 자꾸만 복잡해지는 머릿속이 짜증난다.
원래 스트레스없이 살아가는 걸 제 1 지침으로 삼고 있던 내게 왜 자꾸 쓸데없는 고뇌와
스트레스가 생기냐는 말이다. 최소한 진주에게 usb를 빌려주기 전까지 내게 가장 큰 스트레
스는 중단한 글을 어떻게 마무리 할까하는 고민이 가장 큰 것이었다. 업무야 밀리지 않게
바로바로 처리하는 스타일이고 여자친구와도 빠구리 잘 뜨며 잘 살고 있는 내게 왜 자꾸 짜
증나는 일이 생기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대리님!”

한숨과 짜증 섞인 몸짓이 진주에게는 더 없는 불편함으로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불러온다. 젠장, 무슨 말이 나올지 벌써 겁부터 난
다.

“아까 멋졌어요~”

“으.. 응? 그.. 그래?”

“예... 제 속이 다 시원하던데요?”

“그... 그래? 흐흐흐흐”

억지 웃음을 지어내며 조금씩 조금씩 나를 다잡아간다. 그래도 수놈이라고 멋지다는 말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다. 바보같이 화사한 진주의 웃음 앞에 다시 약해지는 나를 보고
있다.

그러나 다시 침묵이 시작된다. 침묵이 시작되면서 동시에 불안감은 다시 엄습해온다. 결코
대기업처럼 월급이 많다거나, 복리후생이 겁나게 좋은 회사는 아니지만 중견기업이 보너스
며 성과급같이 직원들에게 나눠주는 회사는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 마디로 회사를
나갈 생각도 없고, 이보다 좋은 회사를 들어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는 것이다. 그저 월급
쟁이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월급쟁이를 좋아한다. 그 누구보다도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
고 개인적인 시간을 스케줄에 맞춰 적절히 사용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다. 비록 성
공한 사업가들 보다 금전적으로 여유롭지는 못하지만 나름 하나하나씩 마련해가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생각한다.

‘에이, 들어가자마자 빌어야지 뭐....’

아마 대기업이라면 인사고과 점수가 깎이는 문제가 아니라 기업이미지 실추라는 명목하에
퇴사라는 길을 걸어야 했겠지만 또 이런 면에서 중견기업이라는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애
써 홀가분한 마음을 가지려 해본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되겠는가? 회사일이야 그럭저럭
마음을 잡는다 치지만 지금 옆 자리엔 진주가 앉아 있다. 누군가에게 대놓고 고민을 털어
놓을 수도 없는 일을 알고 있는 한 여자가...

“지....”

고속도로의 휴게소 푯말이 1km를 알리고 있었다. 잠시 쉬면서 담배도 필 겸 쉬어가자는 말
을 하려다 말을 멈추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진주가 귀여운 얼굴을 하고 단잠에 빠져 있
는 모습을 보니 그녀를 깨우고 싶지가 않았다.

휴게소의 날개도로로 진입하자 긁쟁이로 잔뜩 긁어 놓았는지 타이어가 마찰되며 드르륵거린
다. 그럼에도 진주는 여전히 곤히 잠에 빠져 있다. 결코 크지 않은 차, 준중형의 구식 승용
차의 좌석에 폭 감싸인 채 심히 낮은 숨을 들이 내쉬는 진주를 보자 무척이나 예뻐 보인다.

‘예쁘다...’

화장을 짙게 하지는 않지만 머릿칼이나 눈썹이 진한 탓에 마치 인형 같은 모습은 변함이 없
다. 어여쁜 아기 인형 하나가 놓여진 것처럼 진주의 얼굴은 손으로 빚은 것처럼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예쁘다.

대충 빈자리를 찾아 조심히 차를 세우고 기어봉을 ‘P'로 맞춰놓는다. 사이드 브레이크는 드
륵 소리가 날까 생략하면서 몸과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감상한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풍만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커 보이는 가슴이었다. 안전벨트가 굳건
히 그녀의 몸을 잠그고 있음에도 봉긋하게 올라 선 가슴 부위를 바라보며 조금씩 힘이 들어
가는 자지를 느낀다. 워낙 타이트한 남방셔츠를 입은 탓인지 벌어진 단추와 단추새로 힐긋
보이는 검은색의 브래지어도 마음을 동하게 만들어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옷차림, 얇디 얇은 하얀 남방셔츠 안에 일부러 보여주려는 듯 한 유색
의 속옷, 그 색이 검은색일수록 야한 상상의 나래는 더욱 넓어지고 있다. 검은 색 반바지를
매치한 진주의 옷차림은 한 커피전문점의 직원과도 같은 분위기가 연출된다. 끈으로 된 멜
빵을 엑스자로 교차시켜 입은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색기가 묻어난다. 비록 몇 년전 유행하
던 옷차림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유행을 전혀 따르지 않는 내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통통한 얼굴과는 반대로 곧고 날씬하게 뻗은 손가락과 하얀색 매니큐어를 손톱의 끝부분만
바른 것하며 발톱에도 흰색의 매니큐어가 곱게 발려져 있다. 샌들을 신은 진주의 발 역시
통통하다는 느낌보다는 날씬하다는 느낌부터 들어온다.

키가 작다. 그래서 귀엽다. 한 160cm는 될까? 아마 조금 모자란 듯 싶다. 하지만 귀여움이
끝이 아니다. 풍만해 보이는 가슴이며 물론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엉덩이의 모양도 도톰하
니 탱탱한 느낌이었다. 지금 만나는 여자친구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는 진주이다.
키만 작다 뿐이지 하나하나 뜯어보면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미모를 겸하고 있다.

‘보지털도 진하겠지?’

팔뚝에 돋아난 솜털보다는 조금 짙은 체모를 바라보며 상상을 한다. 귀밑머리, 목줄기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솜털, 팔에 난 털들은 다른 여자들에 비해 상당히 많았다. 털이 많으면 미
인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긴 하지만 요즘 시대에 털많은 것을 여자들은 극히 기피
한다. 진주도 예외는 아닌가보다. 팔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매끈한 다리가 왁싱을 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깼다...’

내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을 때, 진주의 숨소리 역시 잠에서 깨어난 숨
소리라는 걸 느꼈다. 평온한 숨소리는 사라지고 조금은 인위적인 숨소리로 변해있었게 때문
이다. 게다가 살짝 벌어졌던 입술도 어느새 곧게 다물어져 표정관리를 하는 사람처럼 근육
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진주씨!”

시동을 끄자 시끄럽던 엔진소리가 끊기고 곧 퍼붓는 빗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온다. 아침부
터 이어진 비가 조금 약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거칠게 내리고 있었다.

“어머, 깜빡 졸았어요... 죄송해요....”

내숭은... 지지배... 나는 알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진주를 훔쳐보고 있을 때 긴장하며 떨던
손을, 꼼지락 거리던 발가락을...

“피곤... 했나봐요? 괜찮아요”

“네... 어제 잠을 제대로 못자서...”

잠을 제대로 못잤다고? 왜? 혹시...
야설을 쓰면서 생겨난 버릇 중에 하나가 생활 면면히 생겨나는 모든 일들과 여자들의 말을
이 전부 하나의 소재거리로 전락하는 것이었다. 가령 잠을 못 잤다면 남자와 알몸으로 뒹구
느라 못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나 길가다 눈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글속으로 담아내고
싶다는 충동을 일으키는 것처럼 말이다.

설마... 진주가? 또 모르지... 원래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법이라고 했거
든! 근데 이런 얼굴과 그런 요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페이스잖아! 그런 게 어디 있어!
원래 여자는 벗겨 놓으면 다 똑같아 지는데....

“왜... 왜...?”

바보처럼 되묻고 있다. 설사 남자랑 빠구리 뜨느라 잠을 못잤다고 하더라도 진주가 내게 그
말을 해주겠냐? 멍청이...

“그냥 잠이 안와서 책 좀 보다가...”

어? 너 왜 얼굴이 빨개져? 혹시 니가 읽었다는 그 책이 설마 내가 쓴 글들은 아니겠지?
이젠 별... 나도 내가 참으로 한심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잠깐 볼일보고 커피나.... 한 잔....”

“대리님! 우리 밥 먹어요... 저 배고파요....”

아~ 젠장! 졸라 귀엽다.
인터넷에 떠도는 울상을 한 고양이처럼 배고픔을 호소하는 요 매력적인 지지배... 따먹어버
리고 싶어 미치겠네!

“어? 밥? 그.. 그래.. 머..먹어야지...”

“근데 대리님 아까는 말씀도 잘하시더니 왜 이렇게 말씀을 더듬으세요?”

그러게나 말이다! 왜 자꾸 더듬을까? 바보, 머저리처럼 보이게 말이다!
널 따먹고 싶어서 그렇다라고 말해주리? 그럼 한 번 대 줄래?

“더.. 더듬긴...”

“에이... 지금도 더듬으시면서... 혹시....”

“혹시 뭐?”

“저랑....”

혹시 뭐? 한 번 대주겠다고? 아니면 내 마음을 알아버린 거니?

“저랑 밥 먹기 싫으셔서 그런 거는 아니죠?”

“설마~ 내가 왜 진주씨처럼 예ㅃ....”

헙!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렇지만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걸 알아챘으려나?
나 너한테 지금 작업거는거야... 세상에 이런 작업이 있겠냐만은.... 상상과 실전은 너무도
다르다는 걸 지금 비로소 깨닫고 있는 중이거든.

“푸힛!”

예쁘다는 말을 싫어한다는 여자는 들어도, 보지도 못했다. 또 모르지 진짜 니주가리씨빠빠
처럼 생긴 걸 아는 여자에게 예쁘다고 말하면 화를 낼지... 그러나 정말 진심을 담은 칭찬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진주도 마찬가지였다. 혀를 빼꼼히 내밀더니 기뻐
하며 가방을 챙기는 모습을 보니 괜히 내 마음까지 흐뭇하다.

‘근데 정말 궁금한 건... 너 내 글을 본거니? 못 본거니?’

차에서 먼저 내려 우산을 받쳐 진주가 올라타 있는 조수석으로 향한다. 캬~ 이놈의 기사도
정신, 진짜 매너 작렬이지 뭔가...

“고마워요~”

고맙긴... 난 어서 빨리 너와의 어색함을 풀어나가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단 말이야. 총체적
난국을 어서 헤쳐 나가려면 차라리 너와 친해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고 말았다는 거야...

힐을 신었음에도 어깨 언저리밖에 오지 않는 아담한 진주와 나란히 우산을 쓰고 걷는 기분
이 참으로 묘하다. 살짝살짝 닿는 살과 우산이 작은 탓인지 조금씩 젖어오는 나의 왼쪽어깨
의 축축함이 기분 좋다. 마음 같아서는 진주의 어깨를 잡아 안고 바짝 다가서고 싶지만 그
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대리님 쪽으로 더 쓰세요... 다 젖잖아요~”

“괜찮아... 금방 말라~”

마음씨도 참 예쁜 진주, 오빠는 괜찮단다. 크하하하하

뭇남자들의 시선이 진주를 향한다. 비록 쭉쭉빵빵한 스타일의 여자가 아님에도 그녀의 귀여
움에 매료된 눈빛을 보내는 건 노인이며 젊은이들까지 다양하다. 역시 내 눈이 아직은 썩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진다. 누구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여자에게 마음이 팔린 것이라면 그것
또한 자존심 상할 이유니까.

함께 밥을 먹고, 나란히 앉아 빗길을 달리고, 함께 커피를 나누며, 오고가는 약간의 스킨십
에 기쁨을 느끼며, 지극히 일상적인 약간의 대화에 웃는 시간, 일적인 출장이라기 보단 정
말 그녀와 드라이브를 즐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사무실로 들어와 팀장에게 개처럼 욕을 얻어먹지는 않았지만 직원들 앞에서 개쪽을 당
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 개쪽이 진주 앞이라는 게 더 창피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알
고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이 무척이나 억울하다는 것을...

‘서대리! 직원들 앞이라 쇼한 거 알지? 잘했어! 잘했어!’

담배 한 대 피자더니 고작 한다는 소리가 일부러 그런거라고? 너 감자 오늘 내 술꼬장 한
번 당해 볼테냐?

‘팀장님, 직원들 사기 충전 때문에 일부러 그런 거 아시죠? 이해해주세요~’

한 번 해볼까!!!!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들어오니 진주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 조용히 다가온다. 언제 갈아 신
었는지 삼선아이다스 슬리퍼를 끌고 다가오는 그녀, 너 언제 계단에서 내려 온거니 라고 묻
고 싶을 만큼 더욱 아담해진 사이즈에 웃음부터 나온다.

“이제 드리네요.. 잘 썼습니다.”

“헙! 으... 으응...”

두 손으로 살포시 내 손바닥 위로 떨어뜨려주는 징글징글한 usb메모리... 정말 잊고 싶은
물건이 드디어 내 손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가방 안으로 냅다 던져 넣고는 지퍼까지
찍 닫아버린다.

‘으~~ 꼴도 보기 싫은 usb’

진주 덕분에 하루하루가 너무 위태롭게 지나가는 것 같다. 별일이야 생기겠냐만은 나를 아
는 누군가에게 야설작가로 낙인이 찍혀버렸다는 것은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다. 오늘로서
진주는 알면서도 눈을 감아 준다는 것을 느꼈지만 한 번 떨어진 이미지 실추는 나중에 독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든다. 결국 나는 진주에게 책잡힌 남자로, 직장의 윗사람
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거다.

그렇지만 다행이다.
시간이 갈수록 무뎌진다. 내 성격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까먹는다. 내 버릇처럼...
회식자리에서 술 한 잔 받아놓은 채 평소처럼 웃고 떠드는 내 모습을 보자 괜찮아 지는 것
같다. 처음엔 회사를 그만 둬야 할까 하는 고민처럼 크게 느껴졌던 일이 며칠 지나보니 아
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렸다. 다행이지만 허무하다. 그리고 깔끔하지가 못하다. 진주에게 애
써 변명이라도 했다면... 아니면 회사에 알려져 그 어떤 일이라도 벌어졌다면... 아마 이런
찝찝한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일은 크게 벌어지지 않았지만, 한 사람.. 그것도 여자인 진주라는 단 한사람에게 변태라는
이미지를 안겨준 채 일이 허무하게 끝나간다. 그래서 다행이지만 찝찝하다는 거다.
내가 앓고 있는 이 병이 아마 한국사람이기 때문이겠지? 나 자신보다는 타인의 눈을 더 신
경쓰면서 살아가야 하는 한국인의 습성에서 오는 걱정이고 고민일거야... 알지만 마음은 영
찝찝하다.

사장님 돌고, 본부장 돌고, 그 다음으로 팀장이 돌아간다. 술잔을 들고... 다음은 누구 차롄
가? 아! 잊고 있던 우리 그 여자! 고미영아줌마 차롄가?

“마! 서대리! 뭔 인상을 그렇게 쓰고 있어? 한 잔 받아!”

아줌마... 많이 퍼 드셨군요... 제발 오늘은 나 끌어안고 울지나 마쇼! 남들이 보면 우리 진
짜 오해한다니까요!!

여느 회사나 갖고 있는 회식문화, 술잔 돌리기... 표면장력 우수하게 따라준 잔을 비우고 매
너 좋게 화장지로 술잔을 둘러 닦는다. 그리고 다시 고미영에게 잔을 돌려준다.

“조금마~안”

입모양으로만 말을 하는 이 여자, 안 그래도 조금만 드리려고 했어요... 나한테는 술잔이 넘
치도록 주셨지만 저는 조금만 따르려고 했다고요. 왜냐하면 저는 기사도 정신 훌륭한 매너
남이니까요... 사실은 월요일 아침부터 괴롭힐 당신이 무서워서 조금만 드린답니다.

어휴~ 우리 감자 팀장님은 오늘 기어서 들어가시겠네... 워낙 술 잘드시는 본부장님은 뭐...
그리고 보자... 진주... 우리 진주... 보아하니 좀 드셨네요~ 볼이 발그래진 게 주변 남직원들
이 무척이나 관심을 보이셨나보네요~

무척이나 특이한 회식문화, 우리 회사는 거의 모든 회식이 1차에서 끝이 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더 이상 술을 보기 싫을 정도로 먹이기 때문이라고 말을 하고 싶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좋은 현상이다. 1차에서 노인네들 취할 때까지 먹고 2차부터는 젊은 사
람들끼리 먹으라는 의도인데... 누구하나 2차를 가자는 말이 안 나올 정도로 1차에서 먹으
니까 거의 1차로 끝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알딸딸하다.

“헙!”

시간이 지날수록 술자리는 점점 더 끈적지근해진다. 고미영도, 팀장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
들이 눈동자에 힘을 잃고 몸은 건들건들 흔들리어 간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울린다. 횟
집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들여다보니 벌써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다. 이제 알겠는가?
7시부터 시작한 1차가 아직도 진행이 되고 있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누군지 안 봐도 훤하다. 내가 술을 먹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한 여자일 것이다. 바로 고미
영이 말하던 멸치, 내 여자친구의 들들볶는 전화라는 걸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의식처럼
행해지던 술잔 돌리기는 이미 끝이 난 상태에서 삼삼오오 몰려 사회적 얘기, 업무적 얘기,
또는 개인적인 얘기들을 나누는 직장동료들의 눈을 피해 빠져나온다.

산골짜기에 횟집이라... 뭔가 부자연스럽지만 회사 근척의 음식점 중 가장 소문난 곳이기도
하다. 마치 오리요리집이나 산채정식을 할 것 같은 분위기지만 실상 알고 보면 횟집이라는
게 너무 신기한 곳이기도 하다. 음식점 뒤를 둘러 싼 푸르른 산과 함께 조경석이 멋들어지
게 어울리는 이곳은 쉼터도 가득하다. 음식점 뒤편이나 앞쪽으로 놓여진 벤치며, 테이블들
이 잠시 잠깐 담배를 피우거나 전화통화를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빈자리를 채워진다.

“여보세요~”

“야! 너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안 들어가!”

귀신 같은 뇬, 전화를 받자마자 거친 말로 사람을 당혹케 한다. 말했듯이 사생활을 침범받
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지라 생판 모르는 사람들인데도 그들을 피해 산 속 깊숙한 곳까지 슬
금슬금 걸어 들어간다.

“회식이라고 했잖아~”

“또 만땅 꼴았구만! 언제갈거야?”

“끝나야 가지...”

“너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해? 너 회식 맞아?”

하아~ 알면서 또 그런다. 사람들 있으면 전화 통화 잘 안하는 거 알면서도 꼭 묻는다. 그리
고 내가 너보다 2살이나 많은 오빠거든!

“맞아~ 시끄러워서 조용한대로 온 거야”

“진짜야? 너 이상한데 간 거 아니지?”

시끄러우면 시끄럽다고 지랄이고, 조용하면 조용하다고 의심이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지 당췌 이해할 수가 없다.

“이상한 데는 무슨... 그런데 갈 돈도 없다”

“뭐야! 돈 만 있으면 가겠다는 얘기야?”

“꼬투리 좀 잡지 마! 그런말이 아니잖아~”

“지금 뭘 잘했다고 짜증이야 짜증이!”

아~ 내 인생아... 왜 난 여자만 만나면 이렇게 사납고 지랄 맞은 여자만 만나는 걸까! 이 전
여자 친구도 엄청나게 지랄 맞았었는데... 남들은 지고지순 하면서도 순종적인 여자들 잘만
만나드만... 난 왜...

“내가 언제... 1차 끝나면 바로 갈거니깐 먼저 자”

“나 재워 놓고 또 언제 들어가려고?”

“가긴 어딜 가~ 집에 가야지~”

“너 한 번 만 더 걸려 봐~ 그땐 진짜 가만히 안 둬~”

그래... 내 죄가 크지... 내 죄가 커. 부끄럽지만 바람을 피다 걸린 이력이 있는 남자로써 이
런 조임을 당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지. 솔직히 바람이라고 할 것도 없이 일방적으로
나를 좋아하던 고교시절 친구 만나서 술 한 잔 먹고 같이 잔 거 밖에 없는데... 하필 그 날
집으로 찾아온 여자친구 때문에 고해 아닌 오해를 산 것이다. 우리 엄마도 잘 아는 고교시
절 친구, 그저 시집가기 전 나와 단둘이 술이 한 잔 하고 싶다던 그녀와 함께 술을 먹은 장
소는 다름 아닌 우리집이었다.

“뭘 걸려... 걸리긴... 나 들어가 봐야 돼!”

“아무튼 조심해 너~ 빨리 들어가!”

뚜~~~
이런 씨... 그래 욕은 하지 말자. 그래도 내 사랑스런 여친인데.. 그렇다고 전화를 이렇게 사
납게 끊어버리는 건 좀 그렇다. 속칭 속궁합이 잘맞아 만나기는 하지만 이럴 땐 정말 확 걷
어차 버리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결혼을 한 인생 선배님들이 항상 말하는 게 최
대한 늦게 가라, 그리고 여자 얼굴 필요 없다.. 착하고 순종적인 여자를 만나라고는 하는데
어찌 얼굴을 안 볼 수 있는가!

답답함에 벤치가 나오자마자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원래 산길이라 주인장은 담배를
삼가달라는 표시물이 여기저기 눈에 띤다. 하지만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는 이것만큼 좋은
게 없기에 그 협조문을 건성으로 흘려버린다. 다만 불씨는 잘 끄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한다.

폐부 깊숙이 빨려 들어오는 담배연기가 좋다. 답답함이 더욱 가중되는 느낌이지만 머리로는
후련함이 감돈다. 비가 그쳐 습하기는 하지만 그 촉촉함이 좋다. 시원함을 느끼기엔 바다보
다 산속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담배를 다 피워내고 바닥에 비벼 끄고 발
로는 꽁초를 아예 짓이겨버리고 나서 다시 한 번 눈으로 불씨를 확인해본다.

“어?”

어둠속에서 방금 내가 꺼버린 불씨가 아른거리고 있다. 거리로 봐서는 20m쯤 떨어진 조금
더 깊숙한 곳에서부터 불씨가 보였다. 누군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다. 딱 보아하니 여
자다. 음영속에 숨은 작다란 실루엣을 봤을 땐 여자가 분명했다. 덩치가 작은 여자아이 같
아 보이기도 한다.

‘여자잖아?’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담배 피우는 여자가 좀 쉬워 보이기는
하다. 그래서인지 지붕이 없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를 보면 항상 얼굴을 확인하는 버
릇이 있다. 담배를 피는 여자가 다리 한 번 벌려줄 것도 아니지만 그냥 얼굴이 궁금하다.
솔직히 욕먹을지 모르겠지만 예쁘면 다시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만 못생긴 여자라면 뒤돌아
침을 뱉어버리기도 한다.

‘어? 쟤... 쟤는?’

어둠속에 적응한 동공이 점차 시야를 밝혀준다. 그렇다고 또렷하게 보이는 건 아니지만 충
분히 윤곽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여자가 보인다.

하얀 남방셔츠, 검은색 반바지... 난 눈을 껌뻑이다가 손으로 비벼댄다. 진주였다. 생각해보
니 자리에서 빠져 나올 때 진주의 모습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진주는 전화통화를 하거나 다
른 사람과 있지는 않았다. 혼자 어두컴컴한 산길에서 담배를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 손놀림
이 능숙하다. 밤하늘에 퍼져 올라가는 담배 연기도 분명 능숙함이 묻어나는 모양새다.

어쩌면 나는 위선자 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진주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실망스러운 느낌이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여자가 담배를 피우
는데 실망감이 든단 말인가! 아이같이 귀여운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담배를 아주 멋
들어지게 피워내는 진주의 모습을 보니 입맛까지 씁쓸하다.

뒤돌아 내려온다. 차마 그녀와 마주치면 짜증을 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진주가
담배를 피우지 않을거라는 생각을 했을까? 정말 내 자신이 바보같다. 세상 모든 것이 내게
맞춰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기준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은 마음이 컸나보
다. 아니, 내가 어쩌면 진주를 글에 담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마음에 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 너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진주와 사귈 수 있냐는 물음을 한다면
못되게도 그렇다고 말할 것 같다. 그런데 진주의 담배 피우는 모습이 싫어진다. 여자친구와
모텔에서 한 빠구리 뜨고 난 후 나란히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우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지만, 담배 냄새가 싫다고 담배피우고 난 후면 키스 조차 안해주는 여자친구가
짜증날 때도 있지만 왜 진주의 담배 피우는 모습이 싫은 걸까?

괜스레 발걸음이 무겁다. 그러고 보면 성격이 이상하다. 내려오니 서른 명 쯤 되는 회사 사
람들이 나와 있다. 하나같이 취한 모습들이다. 이제 곧 모두들 집으로 흩어질 준비를 마치
고 있는 중인가보다.

“어디 갔다 왔어!”

그 여자가 나를 찾았나보다. 내가 다가서자마자 등짝을 시원하게 후려치더니 눈을 흘긴다.
그러면서 팔을 잡으며 흔들리는 중심을 바로 세우는 그녀이다.

“내가 너 대리 불렀어... 나 잘했지?”

“예... 감사합니다.”

“우리집 경유해서 간다고도 말했다~~~~~”

“그럼요~ 밤도 늦었는데... 모셔다 드려야죠~”

“어유~ 착해라... 우리 서대리 이래서 좋아한다니까”

완전 혀가 돌돌 꼬여 있다. 그래도 차라리 이중적이지 않은 이 여자가 더 좋다.
뭐냐... 진주가 담배 피우는 걸 두고 이중적이네 어쩌네 하는 거냐?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한국 남자인가보다.

진주도 곧 내가 내려온 길을 따라 내려오고 있다. 또 수수하면서도 귀여운 얼굴을 하고 뿔
뿔히 흩어지는 사람들 틈에 껴서 맑은 웃음을 보이고 있다. 예쁘다. 귀엽다. 불 한잔 들어간
발간 볼을 깨물어주고 싶다.

“아주 넋이 나갔네 나갔어!”

이 여자... 사람 정말 돌게 한다. 그렇게 크게 말하면 어떡해욧!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들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곧 진주를 바라본다. 서로 번가르며 바라보
던 사람들... 그 눈빛은 뭐냐고! 나 진주한테 실망했다고 여지껏 설명했구만!!

“뭐야... 서대리... 진주씨한테 호감있어?”

후우~ 사장이 물어온다. 이럴 땐 어떡해야 하냐고.....

“아뇨.. 그... 그게... 그러니까...”

“이야... 드디어 우리 회사에도 사내커플 한 쌍 탄생하는 건가?”

“사장님, 그게 아니구요....”

“결혼 해! 내가 부주 두둑히 할테니까!”

그렇다고 격려의 어깨두두림을 할 필요까지 없지 않냐고요... 짜기라도 한 듯 봉고차에서 대
리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사장이 먼저 가고 그 다음은 본부장 순으로 먼저 떠나간다. 그
리고 감자 팀장과 진주가 고급승용차에 올라탄다. 단발머리를 손으로 잡고 인사를 보내는
진주의 자태에 다시 눈길이 머문다. 그리고 그녀를 태운 차가 멀어질 때까지 나는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너 그러다 침까지 흘리겠다!”

“차장님!”

“너 힘겨운 싸움이 되겠어... 진주 눈독 들이는 인간들이 많아~”

“뭐예요? 아침엔 그렇게 우울하시더니, 한 잔 들어가니까 다시 회복하신거예요?”

“넌 여자를 몰라... 그러니까 그런 멸치같은 여자나 만나지....쯧쯔”

“자꾸 멸치, 멸치 하지 마요!”

“이게 어기서 승질이야! 죽을래?”

우리의 실랑이를 바라보던 대리기사의 눈빛이 미친사람을 쳐다보는 듯 하다. 겨우 출발을
하기는 했지만 가는 내내 나는 그 여자와 다툼 아닌 다툼을 해야만 했다. 길고긴 일주일이
끝나는 게 어찌나 후련하던지... 집에 오자마자 시원한 물로 샤워까지 하고 나니 더욱 상쾌
한 기분이 들었다.

버릇인양 컴퓨터 앞에 앉은 후 가방을 뒤적거려 진주가 건내 준 usb를 꽂는다. 술이 조금
취하기는 했지만, 쓰던 글을 이어 쓸 정신은 없지만 오늘 느낀 진주의 인물 서술은 꼭 하고
싶었다. 언젠가는 내 글의 등장인물이 되어야만 하니까. 우리 멸치는 이미 글 속의 도린이
로 묘사되고 있으니까... 쭉빵했으면 하는 염원을 담아 묘사하고 있으니까...

이 글들 때문에 나는 변태가 되었다. 내 이름이 곱게 적힌 폴더 안으로 낙서장과 함께 연재
된 또는, 연재해야 할 미완성 된 글들이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어쩌면 버려야 할 쓰레기 글
때문에 나는 하지 않아도 될 마음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나는 지우고 싶지 않다. 나
의 낙이고 나의 취미이자, 또 다른 성적분출구이기도 하니까...

‘어? 뭐지 이건?’

손이 떨린다. 심장이 뛰고 정신이 맑아진다. 취기는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린다.

[변태.txt]

내가 쓴 글의 파일명이 아니다. 처음 보는 파일명에 순간적으로 진주가 보지 않았으면 하
는, 안 봤을거야 하는 자그마한 바람도 물거품이 돼버리는 순간이었다.

[독특한 취미가 있으시네요... 변태! 비밀로 할게요~ ㅋㅋㅋ 완결하면 말해주삼~]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탠 리얼 397%!
진주의 이 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시 마음이 무거워진다. 월요일 아침이 무섭다. 진
주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할지 말이다.
나는 침대로 뛰어 올라 베게를 입에 물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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