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차장 - 5부 2장

박 차장 5-2





오전 11시 30분, 장우는 일을 하다 말고 사무실 창 밖으로 보이는 회색 빛 겨울 하늘을 보았다. 지금 시간이면 지영이 탄 토쿄발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있을 것이다.



“잘가요. 지영씨. 그리고 꼭 행복하게 살아요…”



장우는 촛불 잔치에서 나와 지영을 시부야에 바래다 주고는 바로 집으로 왔다. 섹스로 작별 인사를 나누기 보다는 촛불이 꺼진 후의 짧았던 키스가 더욱 아름답게 두 사람의 추억 속에 남아있을 것 같았다.



“차장님!”



“응?”



“뭐 고민 있으세요? 얼굴이 엄청 안좋아 보이시네요.”



“육 대리는 점점 귀신이 되는 것 같아. 사람 기분을 그렇게 잘 아니…”



“정 대리한테 또 당하셨어요?”



“정 대리? 아니야. 그런거.”



“그럼, 왜 그러시는데요? 이벤트 때문에 걱정되세요? 이벤트 마감 후에도 주문은 계속 들어오고 있는데…”



“그런게 아니라. 친한 친구가 오늘 우리나라를 떠났거든.”



“오래된 친군가 보네요.”



“육 대리, 친구란 말이지. 꼭 오래되었다고 좋은 건 아닌가봐. 육 대리와 나도 봐. 우린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좋은 친구가 됐쟎아.”



“차장님…저 보고 친구라고 하셨습니까?”



“친구니까 이런 고생 같이하고 있지. 친구가 아니면 어떻게 이러고 있냐?”



“예…감사합니다.”



“뭐가?”



“절 친구라고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육 대리. 육 대리하고 같이 일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



“저도 그렇습니다. 차장님과 일하게 된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육 대리.”



“네.”



“조인숙 하고 조인봉 말이야.”



“네”



“고 대리, 정 대리, 안 대리, 세 사람은 자네 계획에서 빼는게 좋겠어. 두 사람은 결혼할거고, 정 대리도 사실 이번 일하고는 상관이 없으니까 말이야. 하긴, 자네도 상관없지.”



“세 사람을 넣지 않는 건 저도 찬성합니다. 하지만, 저도 웬지 빚을 진 기분입니다.”



“그래. 그럼 우리 그걸로 조씨성 가진 사람한테 가지고 있는 미운정 고운정을 떼버리자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알겠습니다. 조인숙 사장이 참석한다면 테이블하고 좌석 번호가 C-4 입니다. 조인봉 사장은 제가 맡겠습니다.”



육 대리와 창가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고 대리가 장우에게 전화가 왔음을 알려줬다.



“차장님, 한기석씨라고 합니다만.”



“네, 전화 돌려주세요.”



“박장우 입니다.”



“…”



“오늘? 오늘 꼭 만나야겠니?”



“…”



“그래. 야누스 9시”



기석에게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전에 야누스에서 만난 이후론 전화 한 통 없었는데…





9시…야누스 앞. 장우는 망설임 끝에 야누스의 문을 두드렸다. 미남형의 웨이터가 문을 열어주고 장우는 기석의 이름을 댔다. 잠시, 웨이터가 들어가더니 마담이 나왔다. 예쁘게 다음은 겨드랑이털을 가지고 있는 여자, 장우의 냄새와 함께 잠을 자겠다고 자신으로부터 나온 정액을 그대로 뒤집어쓴채 나갔던 여자였다. 역시, 마담은 오늘도 짙은 코발트색의 몸에 짝 달라붙는 어깨와 겨드랑이가 드러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박 선생님, 오랜만이네요.”



“안녕하셨어요?”



“그 동안, 한번도 안들러 주시고…너무 하셨어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긴 제가 버는 돈 가지고 출입하기에는 너무 버거워서요.”



“박 선생님은 그냥 오셔도 돼요. 이리 오세요. 한 선생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마담은 장우를 방 하나로 안내했다. 방에는 기석이 혼자 술잔을 들고 있었다.



“장우야.”



“기석아.”



기석이 눈짓을 하자 마담이 목례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무슨 급한 일인데?”



“급하다기 보다는 중요한 일이지. 너 한테 부탁할 것도 있고.”



“나 한테 부탁할만한 것이 있을까?”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을거야. 한삼봉 회장이 내 아버지라는거.”



한기석이 비어 있는 장우의 술잔에 위스키를 따르며 조용히 말했다.



“너가 뭘 물어봤는지, 보영이가 눈치를 챘더군. 어제 아버지가 보영이에게 모두 얘기해 준 모양이야.”



“그렇군. 이거 내가 괜히 다른 집안의 비밀을 건드리게 한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 때문에 곤란한 일이 생겼다면 미안하다.”



“그런 건 아니야. 난 네 덕에 아버지의 상속인에게 인정을 받았으니까. 형으로써 말이지. 잘 된거지.”



“안보영 대리도 그리 기분 나쁜 얼굴은 아니었던 것 같던데.”



“그 녀석? 그 녀석은 결혼 승낙 외에는 아무 생각 없는 녀석이니까. 자신한테 배다른 형제가 있던 없던, 아무런 상관도 없겠지.”



“나 한테 얘기할 것이 이거였니?”



“아~ 미안. 내 가족사를 설명하려고 널 부른 건 아니었어.”

“아버지는 나에게 삼봉 파이낸스를 물려주실거야. 거기에 대해서는 보영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했다던군.”



“잘 됐구나.”



“그런데, 아버지가 조건을 다셨어.”



“조건?”



“그래. 보영을 **제약과 **언더웨어 사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이지. 그리고, 보영이가 **를 경영하고 **가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를 때까지 재정적으로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는 조건이야.”



“…”



“사실은 보영이에게 **를 준다는 결정이 있기 전에도 우리 회사에서는 **를 먹을려고 했었어. 이미 우리 편 주식도 많이 확보해놨고…이젠 현재 경영진의 무능을 꼬집을 만한 꼬투리만 잡으면 되는거지. 너도 알다시피, 조 회장이 자식들한테 회사 경영을 맡기고 후계자를 선택하느라고 회사가 엉망진창이지. 시간이 흘러가면 자리가 잡히겠지만, 난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해.”



“나 한테 부탁할게 뭔지 말해봐.”



“너희 팀에서 지금 추진하고 있는 이벤트를 취소시켜줘.”



“뭐라구?”



“**제약도, **언더웨어도 죽을 쓰고 있어. 단, **언더웨어의 너희 팀이 맡고 있는 사업부분만 빼고 말이야. 하긴, 너희 팀 매출이 얼마 안되서 전체적으로는 무시할 수 있지만, 난, 조 회장 일가의 어떤 변명도 듣고 싶지가 않아. 너희 팀의 매출은 조인숙에게는 가능성이 있다는 걸 나타낼 수 있거든. 물론, 너가 그렇게 해준다면, 너와 너희 팀원들에게는 충분한 사례가 돌아갈거야.”



“넌 부탁한다고 했는데 전혀 부탁으로 들리지가 않는구나.”



“사실은 그래. 난 너에게 너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사항을 알려주는거야.”

“너가 이벤트를 추진하고 설령 그게 성공한다고 해도, **는 삼봉 파이낸스로 경영권이 넘어올거야. 그리고…그리고, 넌 **에선 있을 수가 없어.”



“…”



“왜냐고 물어보지도 않는군… 내가 말해주지. **는 안보영의 **가 될거야. 하지만, 박장우가 안보영과 함께 있으면 박장우가 너무 커 보이지. 넌 **언더웨어에 가면서 ** 직원들에게 너무 많이 알려졌어. 그것도 너무 좋게 말이지. 사장 보다도 더 강한 권위가 있는 사람이 같은 회사에 있다는 건 용납할 수가 없지.”



“이벤트를 취소하라는 것은 들어줄 수 없어. 너에겐 저질스런 속옷 패션쇼라고 보일지 몰라도 이번 이벤트는 우리 팀의 올해 영업결산이야. 너희 집안의 하챦은 욕심 때문에 우리 팀원들의 희망을 깨버릴 순 없다. 어떤 사례를 준다고 해도 나 말고 다른 팀원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고 믿어.”

“그리고, 이벤트 외에도 **를 먹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 그건 너가 알아서 해. 어차피, 나완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회사를 그만둘지는 내가 결정할 문제야. 하지만, 나도 너 만큼이나 보영이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으로 알면 맘이 편할거야.”

“이 정도면 너의 부탁 절반은 들어준 것 같은데.”



잠시 두 남자 사이에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기석이었다.



“그래, 고맙다. 내 부탁 절반은 들어줬어.”



“나도 부탁이 있는데.”



“뭔데?”



“보영이…그리고, 고인하씨. 잘 돌봐줘.”



“내가 돌봐줄 수 있고 말고 할 사람들이 아니야. 보영이 뒤에는 아버지가 계시니까.”



“두 사람 모두 좋은 사람들이야. 너만 받아준다면 너에게도 좋은 가족이 될거야.”



“가족? 크하하하하”

“장우야, 네 부탁은 아직은 못 들어주겠다. 가족이라는 실감이 나야지. 난 말이지. 가족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을 아직 몰라.”



“그럼 나중에라도 한번 느껴봐. 꽤 괜챦아.”

“오늘 얘기는 다 끝난 것 같다. 나 먼저 가볼게. 요새 계속 야근했더니 피곤하다.”



“그래. 피곤할텐데 나와줘서 고맙다. 잘가.”



“그래. 너도.”



장우가 문을 나섰다. 기석은 장우가 잠깐 전까지 앉아 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가족…”

“괜챦다고?”

“하하하…하하하…”



마담은 문 밖으로 빠져나오는 기석의 한스러운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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