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푸른 날 - 15부

점심 때 가 다 지나도록 그녀는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경리 과 의 팀장 이라는 자리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녀의 옆자리가 내 자리라고 하지만 하루에 그녀의 얼굴을 보는 일은 몇 번 밖에 되지 않았다.

오늘 도 그녀는 자리를 비운 체 나에게 진한 외로움만 선물 하고 있었다.

일이 손에 안 잡히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 없는 이 회사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현정씨.”



깜박 졸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부르는 소리에 반응해 손으로 입을 훔쳤다.



“잤어요?”



“크크크크크크큭--”



동료 선배 들은 내 모습을 보고 우스워 죽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침 까지 흘렸네요. 그 서류가 우리 부서에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아요?”



“와하하하하하하-----”



동료 선배들은 이제 책상을 쳐가면서 웃어댔다.

멍한 정신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나의 그녀가 두 손을 허리 춤에 얹고 나를 보고 있었다.



“팀장 님..”



“잘 잤어? 우리 아가.”



금방 사무실 은 웃음 바다가 되어 버렸다. 나는 창피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자려고 이 회사 들어왔어요? 잠은 집에서도 실컷 잘 수 있는데..”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사무실에는 쥐구멍으로 쓰일 만한 것이 없었다.



“서류 다 된 것 같으니까 검토 해 봐도 되죠?”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녀가 내 앞에 놓인 서류를 독수리 먹이 채 가듯 빠르게 가져갔다.

뭐 이미 다 해 놓았으니까. 별 상관은 없지.

그녀는 서류를 검토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할 일은 하고 잤었군요.”



“와하하하하하···”



그만 좀 웃어 똘추 들아.

나는 동료 선배들을 확 쏘아보아 줬다.



“회사는 자려고 오는 곳이 아니에요. 지금도 누군가는 열심히 일하면서 피로가 누적되고 있다는 사실을 현정씨는 알아야 해요. 알겠어요?”



“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답하자 그녀가 책상 수납함을 열더니 자를 꺼냈다.

어제 나를 체벌 했던 도구 였다.



“나는 요즘도 이걸 갖고 있는데 여러분은 이런 것 오랜 만에 보는 거죠?”



동료 선배 들은 팀장 의 플라스틱 자를 보고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 히 저런 자는 지금 보기 가 힘들었다.



“전 이 자를 중학교 때부터 갖고 있었어요. 그때 제가 응원했던 야구 팀이 OB 베어즈 였었죠. 구단 들은 아이들의 팬을 확보하기 위해 지우개다 자다 갖가지 선물 공세를 폈었는데 그때를 기억하세요?”

그녀가 이렇게 운을 떼자 사무실이 금세 시끄러워졌다.



“와~~ 저도 OB 베어즈 팬이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삼성 라이온즈 나 삼미 슈퍼스타즈 같은 구단은 전혀 모를 걸요? 야~~ 그 자 분명히 OB 베어즈 앰블럼이 찍혀 있군요. 모자 쓰고 야구하는 귀염둥이 곰.”



불과 그녀와 이 년 차이 밖에 나지 않았지만 나는 무슨 애기를 하는지 몰랐다.

당연했다.



그때 쯤 나는 샌프란치스코 의 다운타운 71번 가에서 멍청이 벌떼 들과 씨름을 하고 있었을 테니까. 가장 크고 강한 벌을 잡아오면 다니고 있던 학교의 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 의 이들은 모를 것이다.



“언제 까지 시끄럽게 굴 거죠? 이제 그만 일들 해요!!”



그녀의 갑작스런 명령에 동료 선배들이 일제히 책상 쪽으로 시선을 맞췄다.

하마터면 나는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어디선가 “지가 먼저 시작해 놓고” 라는 말 소리가 작게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날이 될 줄 만 알았던 그날은 아무 일도 없이 마감 되었다.



그녀는 내가 퇴근 하기 전에 어디론가로 또 사라져 버렸다.

부하 직원들에게 먼저 퇴근 들 하세요. 라는 말만 남겨놓고..

할 수 없이 나는 회사 로비를 몇 바퀴 돌며 그녀를 찾다가 결국 힘 없이 집에 돌아왔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어떻게 나와 의 일을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지?”



나는 거울을 노려보다가 화가나 비누를 던져 버렸다.

그녀의 얼굴을 이 비누로 빡빡 문지르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눈이 따가와서 견딜 수 없겠지?



대충 몸을 씻고 나서 즉석 카레를 준비해 렌지에 데웠다.

솔직히 혼자 살게 되면 인스턴트 식품에 의존하는 것이 보통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취사가 금지 된 내 방 의 사정 때문에 그렇기도 했지만 혼자 음식을 준비 해 먹는 다는 것이 보통 귀찮고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렌지에 데우기만 하면 되는 레토르트 식품을 즐겨 먹었다.



이 마저도 먹기 싫을 때 가 많았지만.



렌지 에 넣은 카레가 다 되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창가를 슬쩍 바라보았다.

이제는 제법 가을 분위기가 났다.



“가을이구나. 벌써..”



잠깐 창 밖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으니 물 방울이 창가에 하나 둘 맺히기 시작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언제 시작 됐는지 모를 빗방울이 창가에 떨어지며 부딪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걸?‘



저녁을 다 먹고 대충 자리를 치울 때 쯤 창가에 빗방울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예상대로 빗방울은 어느새 빗줄기로 변해 창가를 요란하게 두들기고 있었다.



“쉽게 그칠 비로 는 안보이더니만”



비도 오고 이런 날은 괜히 우울해지는 법이라 나는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냈다.

이런 때 일수록 억지로 라도 기분을 돋우지 않으면 금방 기운을 잃고 무기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별로 마시기는 싫지만..‘



병 맥주를 하나 따서 나발을 불었다.

컵에 따루어 먹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이쪽이 좋을 것 같았다.

목젖이 화끈해지며 금방 가스가 차 올라 트림이 나왔다.

뭐 어때 여기는 나 혼자 뿐 인걸.



비 내리는 창가를 바라보면서 맥주를 마시는 맛도 나쁘지는 않았다.



“이곳에 그녀만 있다면 딱 일 텐데.. 이렇게 지저분한 곳에 오시기에는 너무 고급이신가?”



온갖 생각을 다 하면서 맥주 병을 기울이고 있는데 내 방의 출입문이 스르륵 하고 열렸다.

처음에는 바람 때문인 줄 알았다.

내 자취방이 오래된 사층 건물 옥상 쪽에 있었으니 다른 곳 보다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이 당연했다. 더구나 힘껏 닫지 않으면 잘 닫히지 않는 출입문은 강한 바람에 아주 약했다.

들어올 때 분명히 닫아 놓았었지만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에는 얼마든지 다시 열릴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아무 의심 없이 다시 밖의 출입문을 제대로 닫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반쯤 열려진 내 방 문을 완전히 열어젖히자.



“아악~!”



나는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서늘함을 맛 봤다.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한 여인이 온통 물에 젖은 체 방 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 누구세요?”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었다



<16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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