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협 일룡전기 - 2부

쏟아 내리는 햇살 속에서 가장 빛나는 하나의 검. 남궁자추가 지겨움을 참고 대연검 4초 노룡출사를 연습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곧 할아버지의 칠순 진현이 다가오고, 큰 경사가 있을 때마다 벌어지는 비무대회에서 미검랑이나 소검랑이라는 이름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형 남궁자룡이 강호의 육룡이 된 이후로, 세가의 중심은 언제나 형의 것이었다. 장자라는 것을 제외하면 무엇을 봐도 자기보다 나아보일 게 없는 형인데.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으로 살아온 19년 세월이다. 관례를 치르기 전에 강호출도를 해야 한다. 할아버지의 생신진현은 더없는 기회가 될 것이다.

“도련님. 도련님!”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철흑련의 추섬 아가씨가 천성사에 나타났답니다. 그런데, 그 망할 놈의…….”
“또 그 도척이란 놈과 나타났다는 말인가?”
“예. 도련님. 아무래도 그 백정 녀석을 잡아다가 물고를 내는 편이.”
“아니야. 그래서는 곤란하지. 황총관도 생각을 좀 하라고. 종리추섬이 누구야. 강남 일대 사파의 총본산 철흑련의 외동딸이라고. 정파로 말하자면 소림사 주지의 외동아들이나 마찬가지라고. 솔직히 종리추섬에 비하면 내가 배경에서 달리는 것도 사실이야. 그래서 내가 이 개고생을 하고 있는 거라고. 적어도 강호에서 별호 하나로 통하는 존재가 돼야 부끄럽지 않지. 사실 말이야. 강호의 유명짜한 계집들 치고, 사내 한 두명 없는 년들이 어디 있어. 그 백정놈이 주제를 알아서 거절을 하고 있으니. 언젠가 언질을 줘서 확실히 채이도록 한 후에 마음을 빼앗아야지. 백정놈을 족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야.”
“그래도 이렇게 되면 도련님의 청정한 이름에 분명히 누가 될 혼약이 될 듯 하여서 말입니다. 원경대로의 이쪽 저쪽 그 백정놈과 추섬 아가씨의 일을 모르는 놈들이 없습니다.”
“소문이란 말이야. 이쪽에서 힘이 없거나, 구린 구석이 있을 경우에만 두려운 일이 되는 거야. 더러운 소문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청정한 추섬을 그 소문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맞는 헌헌장부. 생각만으로 멋지지 않아.”
“멋지십니다. 도련님. 일단 이걸로 땀을 닦으시지요. 오후엔 전에 말씀하셨던 수경선생님과의 약속을 잡아 놓았습니다.”
“좋아. 이제야 제대로 일을 하는군. 적어도 안휘 인근에서는 서정적인 문장으론 수경선생을 따라잡을 사람이 없으니까 말이야. 형님은 어쩌고 계시냐?”
“예, 소가주님은 묘시경 일어나셔서, 오전 내내 창천일섬을 연습하셨습니다. 제가 수련을 담당하고 있는 창궁검단의 노호 감조장에게 슬쩍 물어본 이야기인데, 소가주님의 재능도 도련님보다는 못하지만 무시 못할 수준이라고 들었습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걱정 말게. 황총관의 노년은 다음 대의 가주가 될 이 미검랑 남궁자추의 왼쪽 편에서 편히 보내게 될 테니까 말이야. 노력하는 비범한 재능이라 해봤자, 이 천재가 죽을 정도로 노력하고 있는 지금의 시간을 넘보진 못할 테니까 말이야.”
“예, 도련님. 이 황찬성, 도련님만 믿습니다.”
“하하. 걱정 말라고.”

천성사의 소사미 정연은 멀리서 종리추섬과 도척, 그리고 열걸음 정도 떨어져서 추헌이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칠성각의 뒤편으로 올라가서, 숨겨두었던 비둘기를 꺼내 빨간 통을 달아 하늘에 날렸다. 비둘기가 향한 곳은 천성사 지척에 있는 호화루의 동기, 초희에게였다. 초희는 비둘기의 다리에서 빨간 통을 풀어내자마자 기지개를 켜며 짜증을 냈다.
“뭐야. 빨간 색이면 홍돈 아니면 종리 추섬 년이란 소린데, 홍돈은 절을 찾지 않으니 종리 추섬이겠지. 어떻게 한다. 종리 추섬 년이면 워낙 무대뽀라서 언니들을 소집해도 별 수가 없는데. 그 괴물 같은 호위도 그렇고 말이야. 그래도 일단 언니들을 소집하긴 해야겠지.”
머무르고 있는 호화루의 옥상에 올라간 초희는 빨간 색 폭죽을 터뜨렸다. 그리고 호화루의 밀실로 내려가 뺨을 붉히며 차를 준비했다. 밀실의 문을 제일 먼저 연 것은 후덕한 인상을 지닌, 중년의 여인이었다. 날이 찬 듯, 손을 부비더니 안쪽의 화로에 손을 가져가며 눈을 찌푸렸다.
“어디니?”
“천성사예요. 아마 종리 추섬 같아요.”
“휴우. 속만 터지는 구나. 방술사라도 불러서 어떻게 방자라도 해야 할까 봐.”
“그러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안언니는 저번에 무당 불러다 굿을 한 것이 형부에게 걸려서 이혼당할 뻔 했잖아요.”
“괜찮아. 그 인간이야 소심해 빠져서는. 관직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라치면 점보러 가자고 떼를 쓰는 사람인데 뭘.”
“정말요?”
“정언니는? 제일 가깝잖아.”
“솔직히 충성도로 치면 안언니가 일등, 최언니가 이등, 정언니는 좀 열의가 떨어지잖아요.”
“그러게. 언니는 너무 영계를 좋아하니까. 요샌 그 남궁가의 둘째 도령을 따라다닌다는 소문도 있더라. 아무리 애일룡회를 만든 일등공신이라 해도, 벌칙을 좀 주던가 해야겠어.”
“그러게요. 저도 지난 번에 우리 루에서 남궁세가 소가주가 연회를 했을 때, 그 둘째 도령을 본 적이 있는데, 허여멀건 하고 삐적 골아서 우리 도척님에 비하면 비루먹은 당나귀같던데. 정언니는 어딜 보고 좋아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니까요.”
“무슨 이야기들 하고 있어?”

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은 수척해진 얼굴이 더욱 아름다운 여인, 정향이었다. 정향의 애달픈 짝사랑이야기는 원경대로를 넘어 전 안휘성내에 퍼졌는데, 애달픈 그녀를 위로하겠다고 제일객잔의 주인 노대에게 금붙이를 들고 찾아오는 남정네만으로도 청장로에서 원경대로로 가는 객점의 봇놋방이 꽉찼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왔니? 얼굴 못쓰겠다. 그러게 아직 때가 아니라니깐.”
“그래도, 속은 시원해요. 너무 욕심이었나 봐. 하긴 도척님을 혼자서 독차지 하겠다는 것은 너무한 일이기도 하겠지. 언니들에게도 미안하고. 면목이 없지만, 이젠 그냥 멀리서 바라보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런데, 빨간 폭죽이면 종리 추섬 년이야? 아니면 홍돈이야?”
“홍돈? 홍돈은 요새 안 보이던데.”
“폐관에 들어갔었는데, 출도를 했다는 소문이 있어서요. 요새 지분대는 벌레들 중에 사검방의 소가주가 있거든요. 자랑삼아 이야기르 하더라고요. 정검방의 늙은이가 이취임식을 해서 그 옥골의 대제자가 물려받기만 하면 홍돈이 특공대를 이끌고 가서 박살을 내겠다고 했다고.”
초희가 차를 들고 와 정향에게 권하며, 이번에는 양갱을 찾아와서 접시에 놓고는 얌전하게 썰어놓았다. 정향은 한번 힐끗보다가 초희의 간절한 얼굴에 썰어 놓은 양갱을 하나 들어서 입가로 가져갔다. 초희가 제법 당당하게 말했다.
“저번에 홍돈이 그 종리 추섬의 호위에게 암살당하는 편이 나았을까요?”
“아니야. 오히려 기회가 더 좋을 지 몰라. 이번에 폐관을 해서 무공이 분명히 늘었을 테니까. 홍돈이 다른 건 몰라도 세긴 세잖아. 주제도 모르고 분명 우리 도척님에게 지분거릴게 분명하니까. 이번에는 종리 년과 분명히 다툴거야. 양패구상을 하면 그게 제일 좋고, 추헌이라는 그 호위가 좀 다치기라도 하면 살문에다 청부를 하면 돼. 살문에서도 암살의 최고가 추헌이라는 소문에 신경을 쓰고 있으니까.”
“돈이 만만치 않을 텐데.”
“돈이야 내가 내면 되지.”

후덕하기보다는 뚱뚱한 인상의 소주산 최고급품 화복을 입은 여인이 뒤뚱거리며 들어오며 말했다. 휘연먹으로 눈썹을 그린 듯 눈썹이 짙었는데, 흰 얼굴에 짙은 눈썹이 너무 인상이 강해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언니는 아직이야?”
“예. 언니.”
“살문에다 특급의뢰를 하자고. 초희야. 주방에 가서 내가 먹는다 하고 한 상 차려오라고 해. 값을 치르고 남은 돈은 용돈하고.”
“예. 늘 고마워요. 언니.”
“아니야. 그래도 네가 있어서 우리 조직이 돌아가는 건데. 내가 신경을 좀 써야지. 그나저나 다들 생각들을 좀 해봤어. 어떻게 모퉁이 정육점을 망하게 하는 방도에 대해선.”

모퉁이 정육점을 망하게 하는 것은 애일룡회가 탄생되면서부터 시작된 중점사업이었지만, 2년이 지난 지금도 해결하지 못한 난제였다. 10인의 여인으로 구성된 애일룡회는 일룡 도척을 광적으로 따르는 나름 세력을 갖춘 조직이었지만, 정계의 힘으로도, 안휘 상권의 반을 차지한 복강상단의 주인 마님의 힘으로도, 원경대로의 작은 정육점을 없애지 못했다. 정오가 되면 문을 열고, 그 시원스럽고 반짝반짝한 미소로 주부들의 마음을 홀려버리는 모퉁이 정육점, 도척의 마력에는 일부러 반값으로 파는 고깃집을 바로 옆에 세우는 작전조차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참, 언니. 어제 누가 이걸 집안의 가보라고 들고 왔던데, 진짜예요?”
“뭐냐? 금불상이냐?”
“되게 소중하게 생각하던데. 나야 돈이 아쉬운 처지도 아니고, 안 받으려고 했는데, 정성이라고 자꾸 안기니까.”
“잠깐, 보자. 아! 너 그 손님이라는 사람이 청성파 사람이니?”
“잘 모르겠는데. 맞아. 사천사람 같기는 하더라. 남쪽 사투리를 쓰는 게.”
“그 사람을 찾아서 이걸 돌려 줘. 이거 청성파 신물이야. 금장옥불이라고. 이 뒤에 아. 여기까지다. 모두들 보지 마. 너도. 잘못하면 이건 모두를 죽일 수 있는 물건이니까. 어서 보자기로 싸. 어쩌면 추살대가 안휘로 들어왔을지도 모르겠다. 자파의 신물을 함부로 하는 곳은 없으니까. 아마 훔쳐왔을 거야.”
“어떻게 하지. 그냥 안언니가 맡을래. 형부가 안휘지현이니까. 선물로 받았지만, 장물 같아서 신고했다고 하면 안 될까?”
“안 돼. 그 정도의 물건이 아니야. 무림의 고인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사이를 중재할. 정향이를 보호해 있을 정도의.”
“교현이의 남편이 무림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사람 아니야? 저번에 그렇게 들었는데.”
“맞아. 뭐랬더라. 무적신창이라고 했던가?”
“교언니에게 기별을 넣을까요. 교언니의 장원은 여기서 너무 멀어서, 폭죽이 안 보였을 텐데요.”
“그래라. 초희야. 얼른 지급으로 기별을 넣어.”
“그런데, 언니. 그게 뭐라고 보지도 못하게 해요. 구경이나 좀 해요.”
“안 된다니까. 여기엔 청성파 최고의 무공이 적혀 있다고.”
“그래요? 그럼 이걸 적었다가 우리 도척님에게 주는 건 어때요. 어디서 알아왔다고 하고.”
“목숨 줄을 내어놓는 거나 마찬가지야. 무림인들은 이런 데에는 몇 백명의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보들이거든.”
“그런데, 최 언니는 어떻게 그런 사정에 대해 그렇게 잘 알아요.”
“한 때 아미의 문하에 있었었다.”
“그래요?”

철흑련은 위세가 당당한 사파의 거두지만, 그 만큼 적이 많았다. 특급 살수이자, 일급호위인 추헌이 자신들이 올라갈 때마다 터지는 붉은 폭죽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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