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 상편

내내 맑은 날씨만 계속 되더니 우기라서 그런지 많지도 않은 비가 아침부터



종일 내리고 있다. 가끔 꺼내 무는 담배가 그리워 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먼길 떠나 있는 이곳이 우울하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암튼 이 곳의



겨울은 내가 생각하기에 병 생기기에 딱 좋다. 그렇게 피워 문 담배 연기 사이로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 적어 본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생겨 서울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충무에서



서울은 정말 먼 거리였다. 가족이 모두 고향을 떠나와 여간해서 고향에 갈 일이



없던 때로 기억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돌아 가셨는데 아직 한분 할아버지의



두번째 할머니가 살아 계실때였다. 할머니께서 환갑을 맞으셨지만 먹고 살기



힘든때라 어머님은 아버님의 귀향을 반대하셨고 장남인 내가 집안의 대표선수로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다. 배다른 삼촌이 반가이 맞아 주셨지만 아버님이



오시지 않은것을 못내 서운해 하시는 표정을 감출수는 없으신듯 했다. 이러 저러



행사를 마치고 터미널까지 마중 나오신 숙모님을 뒤로하고 서울행 버스에 오르게



되었다. 행사가 행사니 만큼 양복으로 멋을 냈지만 대학 1학년인 내가 입은 옷은



그저 싸구려 마이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에 나에게는 가장 멋진 옷임에 틀림이



없었다. 아직 사람들이 많이 타지 않은 고속버스 아니 서울 남부 터미널로 가는



시외버스라는 표현이 더 맞을듯 싶은 버스에 나는 뒷쪽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몸도 마음도 피곤한 행사였지만 여행은 나에게 즐거움과 기대였다.



출발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서울 가는 사람은 별로 없고 지금 기억으로 마산인가,



진주에서 내리는 근거리 손님들이었다. 나는 장거리 버스를 타면 먼저 자리를 잡고



눈을 감고 버스가 떠날때까지 기다리는 버릇이 있다. 지금도 그렇다. 두가지



장점이 있다. 하나는 누군가 이쁜 아가씨가 옆에 앉기를 기대하는 마음과



또 하나는 빈자리를 찾는 아가씨에게 나는 졸려서 당신에게 관심 없으니까



안심하고 앉으라는 나만의 노하우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대개는 뚱뚱한 아주머니나



할머니 아니면 군인이 앉는다. 내가 여복이 없거나 아니면 대개의 다른 남자들이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각설하고 시끌벅적한 승차가 다 마쳐 갈때쯤



아주머니 두분의 격한 경상도 발음의 대화가 가까이 들리고 누군게 내 옆에 앉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화장품 냄새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자는 아닌듯했다.



역시 나의 여복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차는 터미널을 빠져나와



국도를 내 달리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때 쯤 나는 앞자리에 앉은듯 하신 아주머님이



내 옆에 앉은 사람에게 던지는 말을 들을수가 있었다. 낼부터 열심히 공부하려면



피곤할텐데 잠을 자두라는 요지의 이야기 였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조금 춥게 늦겨져 입고 있던 양복 상의를 벗어 앞으로 덮을 요량으로



눈을 뜰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 약간의 기대가 남았는지 살짝 실눈을 뜨고



옆자리를 보았다. 흐리게 흰색 헐렁해 보이는 면 소재의 옷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눈을 떠 보았을때 그것이 플레어 치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게도



이런 행운이 오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행운은 나의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대학 신입생이던 나의 모습은 멋있지는 않았지만 미 소년의 모습이었다.



아미컷으로 길지도 짧지도 않은 머리는 지금 그때의 사진을 보면 매력적인데가



있다. 어쩌면 서로에게 행운이 찾아 온 것일 수도 있었다. 난 가벼운 하품과 함께



몸을 움직여 상의를 벗어 앞으로 덮었다. 앞으로 상의를 덮으면서 옷의 균형을 옆자리



쪽으로 조금 더 두었다. 그러면서 빠른 시선으로 그녀를 관찰했다. 사람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볼 수있다. 약간은 갸름한 얼굴에 단발머리, 교복 브라우스 쯤으로 보이는



갈끔한 단추 상의, 그위론 가디건 그리고 그 밑으로 아까보았던 흰색 플래어 치마의



모습이었다.



무언가 걱정이 있는 표정과 약간의 기대가 교차하는 모습이었다. 화장끼는 전혀 없고



기껏해야 고3 아니면 대학 1학년의 모습이었다. 정말 운 좋은 여행이구나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을때 즈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옆에 앉은 아이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혹시 나에게... 하는 기대 속에 살짝 눈을 떠



고개를 돌렸다. 그 아인 나를 보고 있었고 무언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달싹 거리는 모습



이었다. 나는 그 아이의 입을 응시 했고 그 아이의 입에서 이쁘게 던져진 말은



자기가 창가에 앉으면 안되겠냐는 수줍은 부탁이었다. 안될께 무에 있으랴. 나는 창가



보다 그대에게 관심이 더 많은데... 나의 동의를 얻은 아이는 살짝 일어나 내 무릅을



타고 창가로 자리를 옮겼고 나는 엉덩이를 시트에 끌며 복도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의 상의 속에 감춰진 팔은 그녀의 엉더이 살을 아스라히 느끼고 있었다.



자리가 바뀌어진 나는 다시 양복 상의를 추스렸고 역시나 상의 중심은 그녀쪽으로 조금



옮겨진 상태로 말이다. 그런 내 모습이 따뜻해 보였는지 그녀는 가디건을 벗어 나와 같은



모습으로 앞을 가렸다. 그녀의 작고 흰손과 봉긋한 가슴선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여전히 플래어 치마 밑으로 하얀 종아리가 가지런히 보였고 그 맨 끝에는 스니커즈



한쌍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자리를 옯겨 앚을때 치마를 깔고 앉았다기 보다는



사뿐이 내려 앉은듯 치마는 이쁘게 펼쳐져 있었다. 내 시선을 늦겼는지 다리를



조금더 모은 그녀는 앞자석의 아주머님과 이쁜 아가씨의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



한두마디 얘기를 나누었지만 그 내용이 기억 나지는 않았다. 나의 양복 상의



한쪽 팔이 그녀의 팔부분을 침범해서 가슴쪽에 가까이 있었고 양복 한깃은 그녀의



왼쪽 팔을 반쯤 덮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디건으로 가리워진 부분의 팔이라 정확한건



아니지만 내 느낌이고 희망 사항이었다. 아마도 앞에 계신 두분의 아주머니와



아는 사이인듯 했다. 아주머니들의 대화는 좀 더 이어졌고 그녀는 물끄러미 오후의



농촌 들녘을 응시하고 있는듯 했다. 시선과 달리 몸은 의자에 약간 파묻듯이 의자를



조금 눕혀 앉아 의자를 세우고 있는 나보다는 조금 더 뒷쪽에 위치한 형상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에 버스는 작은 도시에 도착을 했고 많은 사람들이 내렸고 내 기억으론



우리 뒤로는 사람들이 앉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차에 오르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고



그녀는 잠이 든 듯 고개를 창가로 돌려 눈을 감고 있었다. 앞자리에 계시던 아주머님



두분이 갑자기 일어나시는 모습에 난 잠시 당황했지만 그분들은 바퀴 위의 자석이 불편



하셨는지 한칸 앞으로 옮기셨고 옆자리의 그녀에게 뭔가 말을 하시려다가 잠든 모습에



포기를 하셨는지 그냥 앞자석으로 가신다. 어쩌면 이렇게 축복 받은 상황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며시 그녀를 돌아보는 순간 살짝 떠있던 그녀의 눈이 급히 감기는



모습을 나는 간파할 수 있다.



(이쯤에서 시제가 현재와 과거를 오가고 있다는 필력의 한계를 느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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