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한 여인 - 7부

천한 여인(7)





"헬로우!"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처음 잘못 걸렸거나 장난전화로 생각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TV의 9시 뉴스를 보는 중이었다.

지난날 건설회사가 잘 나갈 때는 외국인 회사의 발주를 받은 것도 있고, 중동지역과 말레이지아등에 공동진출해서 공사를 벌인 적도 있어 외국인과의 교류도 많았다. 하지만 사업을 걷어 치운지도 5년이 넘는데 내게 영어로 전화를 걸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미스터 문"을 찾고, "세인트 빌 인 조지아"니 "미세스 맥밀란" 같은 토막 말을 들으며 나는 이 전화가 오문자와 관련된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 메시지의 골자는 문자의 죽음이었다.



"왓? ...... 오 마이 갓!"

우선 머리를 세차게 얻어 맞은 것 같기도 하고, 가슴을 무엇인가 관통해 구멍이 뻥 뚤려 있는 기분이었다.

갑작스런 부음에 놀라며 허둥대는 나에게 남자 목소리가 몇마디를 해 왔지만 제대로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휀?" "오, 알라스!" "하우 어바우트 ......?" --- 몇마디 말을 지껄이는동안 내 얼굴에는 진짜 진땀이 솟아 나왔고 속으로 욕설도 튀어 나왔다.

제기랄 , 감정을, ...... 더구나 특별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서툰 외국어로 대화한다는 것은 정말 지랄 같은 일이다.

내 질문이나 감탄사가 적절한 것인지 알 수도 없고, 머리를 굴려가며 말 한마디 겨우 생각해서 나오는 것이 내 감정의 적절한 표현도 아니다. 더욱 답답한 것은 상대방의 말을 거의 알아 들을 수 없다는 점이다.

진작 영어를 좀 제대로 배워 둘 것을 ...... 그동안 살면서도 더러 경험했던 후회가 이날은 더욱 절실했다.

답답하기는 양쪽이 마찬가지다. 내가 제대로 응대를 못하자 상대도 계속 대화가 끊기었다.



"여보세요?"

잠시 서로 말을 못하다 수화기에서 우리말이 들려왔다. 나는 허우적거리던 물속에서 구명밧줄을 받은 것만큼이나 반가웠다.

"네, 저는 문영도라고 합니다만 ......"

"아, 저는 오상철이라고 합니다. 돌아가신 분, 미세스 맥밀란이 저희 고모님 되십니다."

비로서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했다.

"그렇습니까? 너무 갑작스럽고 안타까운 소식에 가슴이 아픕니다. 돌아가신게 언제죠?"

"4일 전입니다. 저도 임종 하루 전에 도착했고 어제 장례식을 다 마쳤습니다."

"제가 뭐 돕거나 할 일이라도 ......?"

"아닙니다. 워낙 깔끔하신 분이라 장례가 끝나면 연락드릴 것을 부탁한 명단을 미리 작성해 놓으셨는데 그중 선생님도 계셔서 통지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몇마디 더 조문과 관련된 말들을 나누었다. 사실 장례식까지 다 마친 그녀의 죽음에 지금 당장 내가 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어떻든 갑자기 듣게 된 그녀의 부음은 정말 충격이었고 가슴이 저려 왔다. 그녀가 귀국한지 겨우 4개월 남짓안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

"그런데 어찌 그렇게 갑자기 ....... ? 요전에 서울에 오셔서 만났을 때도 아주 건강하셨거든요."

"아, 선생님은 모르셨나요? ...... "

잠시 상대의 말에 텀이 있는 동안 나는 속으로 반문했다. 뭐를 몰라, 이사람아? 나는 당신 고모하고 씹까지 했단말야. 그것도 네번, 아니 네번반이나 ......

"고모님은 한국에 가실 때 이미 죽음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췌장암이었는데 이미 시기가 지났대요. 본인도 알고 계셨죠. 그래서 한국에 가신 것도 이를테면 고별 여행인 셈이었습니다."

고별 여행? --- 그녀의 죽음을 알게된 것 이상으로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만난 오문자가 시한부, 죽음을 목전에 둔 처지였단 말인가.

통화를 끝낸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온갖 상념에 사로 잡혔다.



"누가 돌아가셨어요?"

부드러운 손길이 내 어깨에 얹히며 역시 부드러운 목소리가 물어 왔다. 아내, 정확이 말하자면 새 아내였다.

문자와 헤어진 뒤 내 인생의 가장 큰 변화는 내가 재혼했다는 것이다.

"응. 미국에 사는 친척벌 되는 누님이야."

"나이가 어떻게 되죠?"

"나보다 꼭 열살 많으니 일흔살이지."

"그래요? 요즘 일흔이면 아직 한창인데 ...... 많이 가까웠던 분이예요?"

"아니, 별로 그런 사이는 아니지만 ......"

아내의 질문도 평범한 조문 성격이겠지만 나는 약간 당황하며 얼버무렸다. 특히 부부 사이에, 비록 그녀와의 결혼 전 일이라도 씹까지 한 여자와 관련된 대화는 웬지 께름직했다.

사실은 바로 당신과 내가 결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해 준 사람이지. --- 나는 행여 표정에라도 나타날까 조심하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정말 나의 재혼은 문자를 만남으로써 가능했던 일이었다.

문자와의 마지막 만남, 그녀가 출국하기 하루 전 한차례 살을 섞은 격정이 지난 후 그녀는 유별나게 진지하고 열정적인 어조로 나의 재혼을 권했었다.

그 말을 꼭 따르려 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그녀가 떠난 직후부터 나에게 5년 넘게 잠겨 있었던 재혼의 문이 열렸다.

참, 일이 성사되려면 그렇게 쉽게 풀려가는 수도 있다.

오랫동안 속절없이 홀아비로 궁상을 떨어 온 나는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난지 한달 반만에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릴만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내 재혼의 시발점은 문자와 48년만에 재회한 때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녀를 만남으로써 나는 거의 절망적이었던 임포텐스라는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것은 말하자면 재혼을 시도할 수 있는 자격증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위에서 "두띠 동갑"아라고 부르는 24살이나 차이가 나는 여인에게 처녀장가를 갈 수 있었고, 새아내는 서울의 꽤 아까운 직장마저 저버리고, 기꺼이 이 강원도 산골의 내 집에서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다.



문자가 출국한지 며칠 후였다.

셋째 매형집에서 우리 6남매는 부부동반으로 모여 일종의 가족파티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첫째 영숙이 누나와 셋째 영미 누나가 "어머, 그래?" "정말 재주나 인물이 아깝지!" 같은 말을 나누다 나를 힐끗 보면서 "저 창수아범이 마음을 돌리면 정말 막내 올케로 욕심낼만 하지."라는 말도 했다. 들어보니 혼기를 앞 둔 여자 이야기 같았다.

"얼마나 대단한 여잔데 ......?"

"아이구, 너는 참견할 일 아니야. 주는 밥상도 못 받아 먹는 사람이 ......"

"그럼! 벽창호한테 무슨 말을 해?"

내가 끼어들자 두 누나들은 손부터 내저었다.

"그런데 왜 그 이야기에 내가 등장해?"

나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그때 누나들의 대화 주인공이 바로 지금의 내 아내다.



누나들의 반응은 그럴만 했다.

내 이혼이 아내의 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자 특히 세명의 누나들은 여자들끼리 일종의 복수심이나 경쟁심리였을까, 나에게 적극적으로 재혼을 권유해 왔다.

직접 대상을 물색해 만남을 주선하고, 내가 거절하면 우연히 만난듯 내 앞에 끌어오는 쇼까지 할 정도였다. 그중에는 정말 마음에 끌리고 욕심나는 여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거절, 혹은 사양을 해야 했다. 그 일이 거듭될수록 나도 울화가 치밀고 스트레스는 쌓여 갔다. 제기랄 ...... 좆이 안서서 못한다는 말까지 누나들이나 그 여인들에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런데 문자를 만나고 씹까지 성공하게 되면서 나는 새롭게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아직 그런 사실을 모르는 누나들은 나의 적극적인 관심을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너 이번에도 나 물먹이면 두고두고 널 저주할꺼야."

영미누나는 이렇게 다짐을 하면서 마담뚜 역할을 맡았다.



홍경란. 36세. 서울 강남 소재 중학교의 13년차 영어교사. 교육자 집안이며 부친은 서울 강남의 명문 고교 교장으로 정년 퇴직. 오빠는 대학교수. 언니는 외국대사관에 근무하며 그녀의 남펀 역시 대학교수. 큰아버지는 90년대 교육부장관 역임. --- 이런 것이 대충 그녀의 인적사항이었다.

나는 전처 강미란과 이름이 란자 돌림이라는 것이 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 말을 꺼냈다면 누구나 나를 미친놈이라고 했을테니까.

직접 상면까지 하고 나자 나는 그녀에 대해 아무 결격사유를 찾지 못했다. 그녀는 화사한 미인형은 아닐지언정 용모나 체격도 모두 매력적이었다. 어떻게 저런 용모와 조건과 배경을 가진 여자가 지금껏 처녀로 남아 있었는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내게는 모든 것이 과분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상대방에서도 OK라는 반응이 나왔다.

그녀는 누나에게 나에 대해 "첫인상이 씩씩해서 좋았다." 고 말했다고 한다. 그말을 듣고는 선생티를 못 버리는군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이 흠은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몇차례 만난 뒤에 결혼하기로 완전히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일단 결정을 하고나자 주도권을 그녀가 쥔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시집 장가 간 자식들이나 주위의 눈이 있어 결혼식은 어디 절깐이나 호텔의 만찬 정도로 간략하제 치루었으면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난생 처음 면사포를 써보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결국 하객 6백명울 수용하는 대연회장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그녀의 은사가 주례를 섰고, 재직하는 학교의 학생들이 축가를 불러주는등 요란한 결혼식이 되어 버렸다.

나로서는 웬지 계면쩍고 사실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그중의 하이 라이트는 사진을 찍을 때였다.

"이번엔 신랑 신부 친구분들 나오세요!"라고 하자 신부쪽에 우르르 몰린 여인들은 모두 출산도 끝난 중년 아줌마들이었다. 그중에 절반 이상은 비만끼가 있었고 마치 신부에게 창피를 주기 위해 나온 친구들 같기도 했다.

신랑 친구들은 더 가관이었다. 나는 그나마 머리염색도 새로 하고 얼굴에는 도랑도 바르고 턱시도 차림이라 나이가 어느 정도는 숨겨졌다. 그러나 친구들중에는 완전 백발이나 깊은 주름이 잡혀 지하철을 타면 누구나 벌썩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만한 녀석들도 있었고, 모두가 환갑을 전후한 연륜을 얼굴에 담고 있었다.



결혼하면서 아내가 강원도 산골의 군청소재지 중학교로 옮기고 내집에서 살기로 한 것도 내 뜻이 아니라 그녀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이제 사모님들 촌지봉투 받는 것이나, 학원에서 미리 배우고 잘난체 하는 아이들 다독거리는 것, 맨날 경쟁 속에 사는 것도 지겨워요. 한동안은 그냥 전원에 묻혀 내 인생에도 좀 여유를 갖고 싶어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서울 강남의 한 공립중학교 교사 자리가 그리 대단한 것도 이때 처음 알았다. 그녀가 강원도 시골로 전출을 희망하자 모두 다섯명의 영어교사가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아내에게 자리를 넘겨 준 시골 교사는 시단위의 원주시로, 원주의 교사는 도청 소재지인 춘천으로, 춘천 교사는 서울에서 한시간반쯤이면 줄퇴근이 가능한 경기도 외곽으로, 경기도 외곽은 서울과 접경인 성남시로, 성남은 바로 아내가 근무하던 강남의 소위 명문교로 ...... 모두가 전출요건을 갖추고 배경도 든든한 교사들이며 이번 전출에 더 없이 만족해 했다는 것이다. 그중의 몇명은 아내를 직접 찾아 감사와 선물을 전하기도 했다.

누나들은 나의 결혼뿐 아니라 그 후에 진전된 상황에 대해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다."거나 "늘그막에 홍복이 터졌다."라는 식으로 이야기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말에는 꼭 동의할 수 없다.

그녀도 나름대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최선을 택한 것이다. 또 나도 그리 꿀리기만 하는 상대는 아닌 것이다.

내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누나들로부터 들은 그녀와 관련된 정보, 결혼 후 아내로부터 직접 들은 감회, 나보다 3살 많은 장모를 비롯한 처가 식구들이 흘리는 잡담, 그녀의 중매에 나섰으나 실패한 진짜 마담뚜의 경험담등을 종합해서 나름대로 내가 정리해본 것이다.



무엇이 꼭 결정적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노처녀 소리를 듣던 홍경란은 한 3년전부터 결혼을 하기로 작정했다.

그녀의 마음이 돌아선 것을 안 부모와 친지등 주위사람들은 "정말 다행이다"라며 적극적으로 주선에 나섰다.

그러나 결혼전선에 뛰어들면서 그녀는 예상치도 못했던 난관과 굴욕과 좌절을 겪게 된다.

"에그, 나이가 너무 많아! 아니, 그동안 뭐 했누? 10년만 일렀어도 사짜 붙은 신랑감은 물론, 재벌가 며느리로도 손색이 없는데 ......"

홍경란 어머니의 부탁을 받은 꽤 소문 난 마담뚜의 첫마디였다.

나이는 그녀를 중매하겠다는 사람들이 누구나 걸고 넘어지는 흠집의 제1과 제1장이었다. 그녀는 이것이 지겨웠다.

그래, 나도 나이 많은 것은 안다. 코나 입처럼 나이도 내 몸에 붙어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사내놈들은 나이 처먹으며 재산도 늘고 승진도 한 것이 다 플러스가 되는데 왜 여자쪽은 그것이 감점만 돼야 하니? 나도 저축이 꽤 있고 10년동안 일류 선생노릇 한 것도 다 내 재산이며 관록이란말야 ---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항변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었다.

순탄하고 화려했다고 할만한 지난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사실 그녀가 노처녀로 남은 것은 아이러니칼하게도 모자랄 것도 부러울 것도 없는 환경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좋은 가정환경 속에서 일찍부터 재원소리를 들은 그녀는 서울대학 영문과를 졸업할 때까지 항상 순탄항로였다.

그녀는 대학원으로 진학해 박사가 될 수도 있었고, 외국유학을 갈 수도 있고, 마담뚜의 말처럼 일류 신랑감을 만나 결혼할 수도 있었다. 무엇이든 그녀가 선택만 하면 가능했고 아무 장애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교사직을 택했다. 새싹 같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순수한 열정은 일에서도 빛을 발했다. 학생들에게 인기가 치솟았고, 그녀의 독특한 교습법은 자주 모범수업의 대상이 될만큼 칭찬이 자자했고, 그녀에게 영어를 배운 학생들은 대부분 영어실력이 놀랍게 향상되었다.

그녀는 노력하고 몰두하는 타이프였다. 더러 그녀에게 접근하는 남자도 있고 주위에서 "선을 보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별로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진짜 좋은 남자나 인연이 될 상대가 아니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끊임없이 새 얼굴을 맞게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반짝거리는 캐리어 우먼으로 살다 보니 어느새 30고개를 넘었고 문득 결혼쪽으로 방향을 바꾸려 했더니 그 앞을 장애물이 막고 있었다. 그 장애물은 바로 화려했다고도 할만한 지난 세월이었다.



중매꾼들이 나이부터 탓하듯 우선 그녀의 나이와 걸맞는 총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찾고 보면 희소가치는 있을지언정 실질가치는 너무 떨어졌다. 그녀는 계속 툇자를 놓았고 그러는 사이 1년 이상을 허송했다.

한 마담뚜는 재벌가의 3남이라는 41살짜리 후보를 내세웠다. 그런데 딸이 하나 있고 얼마전 이혼했다는 것이다.

"정말 대단한 자리야! 지금은 모그룹 이사로 있지만 2~3년 안에 건설이나 식품업종중 하나를 떠 맡을 것이고 ......"

마담뚜는 신나서 떠드느라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변한 것도 몰랐다.

"아니, 나더러 후처로 가라는 거예요? 사람을 어떻게 보고 ......"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도 분이 풀리지 않아 집에 와서는 한참을 울었다.

아예 그녀는 결혼을 포기할 생각마저 들었다. 난생 처음 그녀는 좌절을 겪었고 그 충격을 극복하기 어려웠다.



몇달 후 그녀는 여자 동창들끼리의 모임에 모처럼 참석했다가 여자들의 수다에 휩쓸려 자신이 중매장이에게 모욕 당한 에피소드를 털어 놓았다.

"너 미쳤구나! 네가 결혼할 의사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너는 그 나이에 총각한테 시집갈 생각이었니?"

영미의 말에 홍경란은 이제 친구에게도 모욕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좌중의 모두가 영미의 말에 동조하는 것이었다.

그날 모임의 구성원은 대부분이 이른바 캐리어 우먼이며 전업주부는 없었다. 여고를 졸업한지 15년 이상이 흐르자 그냥 주부들과는 사고방식이나 대화도 어긋나는 것들이 많아 자연적으로 이렇게 끼리끼리 어울리게 된 것이다. 그중 몇명은 이혼했고, 독신주의자, 프리섹스 신봉자, 레즈비언도 끼어 있었다.

"내가 바로 총각 좋아했다가 멍든 년 아니냐. 대한민국 노총각은 지독한 바람둥이 아니면 정신병자야. 그나마 바람둥이는 봐줄 수 있어. 하지만 바람도 못피우는 노총각은 대부분 무엇인가 더 심각한 결점을 갖고 있단말야. 그런 노총각 만나면 너도 인생 골병 드는거야."



영미는 1년전 노총각과 결혼했다가 6개월만에 이혼한 사연을 늘어 놓았다.

정말 순해 터지게 생긴 39살의 총각과 결혼했는데 이게 완전히 마마보이였다. 음식도, 옷을 골라 입는 것도 모두 자기 엄마의 선택만 따랐다. 모자끼리 오래 살아 그렇거니 이해는 하면서도, 그녀가 정성들여 만든 음식이나 사온 옷을 거들떠도 안보는데는 차츰 정나미가 떨어졌다. 남편은 일상사의 사소한 일들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고, 자기 엄마와 아내의 주장이 다르면 언제나 엄마편을 들었다.

자연 고부간이 갈등도 심했지만 남편은 전혀 조정을 하지 못했다. 섹스도 시원치 않았는데 그 이유는 엄마가 "너 요즘 몸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라고 한 것 때문에 자제한다는 말을 듣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혼했다는 것이다.

"총각 좋아하다 나보다 더 심한 꼴 본 여자들도 많아. 네가 노총각하고 결혼한다면 내가 밥 싸들고 다니며 말릴거다."



영미는 또 다른 실패담도 들려 주었다.

같은 또래 한 여자도 39살의 노총각과 결혼했다. 대기업의 경리담당으로 월급도 많고 항상 깔끔하면서도 단정한 신사였다.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함깨 살아보니 도대체 인간미란 없고, 지독한 이기주의에 결벽증 환자라는 것이다.

아이까지 낳았는데 출퇴근시간은 칼같이 지키고 외도는 물론, 술 취한 모습도 본적이 없고 낭비형도 아니었다. 주정꾼 같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정말 그녀의 신랑은 완벽한 남자 같았다.

그러나 집에 와서는 대화나 아이 한번 안아주는 일 없이 책이나 TV만 보다가 가끔 방바닥이나 선반을 손가락으로 쓸어보고 먼지가 보이면 혼자 쓸고 닦았다. 섹스는 한달에 한두번이 고작이고 전희나 후희는커녕 끝나면 바로 돌아누워 버린다는 것이다.

원래 쾌활한 그녀는 남편이 출근하면 그런대로 즐겁게 지냈다. 날로 늘어나는 아기의 재롱을 보는 것도, 음악을 골라 들으며 눈을 지긋이 감을 때도, 이웃 여인들과 깔깔거리며 수다를 떠는 것도 즐겁고 행복했다.

그런데 시계처럼 정확한 남편의 퇴근시간이 가까워 지면 소름이 돋고 진저리가 쳐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결국 이혼했고 그 소감을 "질식에서 벗어난 것 같다"고 했다.



"또 변태 노총각에 대한 이야기도 있어."

친구가 말을 이으려는데 홍경란은 손을 저어 중단시켰다. 비록 세상물정에는 어두웠지만 그녀도 이해는 빨랐다. 그런 노총각과 결혼했다면 그녀 역시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결혼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가 난생 처음의 좌절을 맛본 그녀는 오기로도 이 일에 끝장을 내려 했다. 다만 대상을 재혼남으로 바꾸었다.

처음 재혼남을 소개했던 마담뚜를 만나 은근히 그 재벌 3남의 근황을 물었다.

"흥, 미스홍한테 말 꺼내고 3일도 안되어 짝을 만났고 한달만에 결혼식을 올렸어. 어제도 전화가 왔는데 요즘 깨가 쏟아진다나. 그 신부는 24살이야."

마담뚜는 지난번 그녀의 반발에 분풀이를 하듯 그녀를 약올리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오기가 생겨 결혼이 인생의 새로운 목표로 굳어졌다.



그러나 새로운 길 역시 만만치 않았다.

우선 남자들이 너무 찌들어 보였다. 이혼이나 상처의 흔적인지, 가장으로서의 피로가 누적된 것인지, 정신병자라는 노총각들보다는 모두 맥이 없어 보였다.

그런 점을 차치하더라도 또 다른 장애물들이 있었다. 남자가 괜찮다 싶었는데 중학생인 딸의 표독스런 눈길이며 남자 어머니의 심술궂은 얼굴을 보고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한 벤처기업가는 "얼마나 투자할 수 있나?"를 중매장이를 통해 물어 오기도 했다. "나는 MIT를 졸업하고 IT업계의 촉망 받는 기업가가 되었으니 함께 살려면 여자도 어느 정도 투자를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여자가 10여년 직장생활을 했으면 모아놓은 돈도 꽤 있겠죠."라고 그녀의 돈을 노리는 듯한 남자들도 의외로 많았다.

더욱 황당한 남자도 만났다. 정말 인물도 훤하고 매너도 좋았다.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으며 이혼하고 한국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다는데 사업도 잘 굴러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런 사람을 만나려고 그동안 가시밭길을 걸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혹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너무나 흠이 없어 오히려 이상하다."며 뒷조사를 의뢰했다.

그랬더니 미국에는 본처와 자녀가 엄연히 있고, 국내에서도 한 여자와 동거하며 사업체도 그 여자의 돈으로 차린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나와의 결혼에 앞서 마지막으로 만난 남자는 서울대학 출신으로 행정고시를 거친 중앙부처 3급 공무원이었다. 이제는 기본이 된 뒷조사를 해보니 2년전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고 남매가 있으며 능력을 인정받아 돌발사고만 없다면 승진도 거의 보장받은 엘리트였다. 청렴하기로도 소문나 지금 31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자수정가형이었다.

그녀는 거의 마음을 굳혔다. 그래서 그의 자녀들도 만났다. 고1인 딸과 중2인 아들은 밝게 자랐으며 보통 아버지의 재혼에 반발하는 아이들과 달리 그녀를 환영했다. 그 아들 딸은 전교에서 10위권 안에 들만큼 공부도 잘 하고 모두 서울대학이 목표라고 했다.

"아줌마가 저희들 새엄마가 되시고 우리가 모두 목표를 이룬다면 우리 가족이 모두 서울대 동문이 되는 셈이네요."

딸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이미 행복한 가족이 된 듯 했다. 그러나 밤새 고민하던 그녀는 이튿날 그에게 결혼불가를 통고했다.

그녀는 대한민국의 중.고생, 특히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생활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의 아들이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4~5년간 그녀는 새벽밥을 해주고 밤늦게 그 애들을 학원에서 실어와야 하며 계속 긴장 속에 살아야 할 것이다. 그토록 우여곡절을 겪고 결혼하자마자 내 속으로 난 자식도 아닌 그애들을 위해 희생할 자신이 없었다.

나도 사랑이 아니라 결국 타산적인 속물이 되어 버렸구나 하는 자괴감이 그녀를 괴롭혔지만 그것을 극복할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나를 만난 것이다.

이제 그녀는 결혼 후보자의 좋은 점을 따지기보다 네가티브 방식으로 결점을 점검해 나갔다.

물론 뒷조사도 병행했지만 일단 자신이 뒷바라지해야 할 자녀는 없었다. 경제적 여유도 있어 그녀에게 돈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홀아비 생할중에도 문란한 점은 찾지 못했다.

섹스 능력은 ......? 글쎄, ...... 나에 대한 그녀의 첫인상이 "씩씩해서 좋았다."는 것으로 보아 일단 부정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처럼 나의 처녀장가는 문자가 나를 출발점에 서게 했지만, 결국 골인까지 하게 된 것은 그동안 그녀에게 얼른거리며 좌절과 실패를 안겨준 그 남자들의 도움이 컸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도 "넝쿨 째 굴러 온 호박"을 잡고 희희낙낙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유리그릇, 아니 그보다는 보석만큼 비싼 크리스탈 그릇을 들고 쩔쩔매는 것 같은 면도 없지 않았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지 일주일도 안되서였다.

나는 쇼파에 앉아 친지가 사인까지 해서 보내준 책을 읽는데 열중해 있었다. 마침 아내는 설겆이 중이라 "어이, 재떨이 좀 ......"이라고 했다. 잠시 후 담뱃재를 털려고 보니 재떨이는 없었다.

"여기 재떨이 좀 달라니까 ......?"

좀 큰소리로 말했지만 여전히 뒤돌아 서있다. 세번 째 말을 해서야 그녀는 재떨이를 갖다 주었다. 나는 계속 책을 읽다 흘낏 보니 아내가 없었다. 아직 설겆이는 안 끝났는데 ...... 두리번거리다 안방에 가보니 아내는 화장대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당황했지만 그때도 나는 감이 안 왔다. 이 집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으니 아내가 갑자기 슬픈 기억을 되살렸나 하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내가 당신 재떨이나 갖다 주러 시집 왔나 하는 생각까지 들어요."

한참을 달래고 얼른 끝에 나온 그녀의 말이었다. 나는 그때 아내가 화려하지만 그때문에 불편하고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깨질 수도 있는 크리스탈 그릇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전의 생활, 전처나 아들 딸이었다면 감히 문제도 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미 결혼할 때 그녀와 몇가지 약속을 했다. 아내는 "내가 완전히 촌사람으로 살기는 싫으니 한달에 최소한 두번은 서울 나들이를 해야겠다."고 했고 나도 동의했다.

그래서 한달에 한번은 선물을 싸들고 나보다 5살 많은 장인, 3살 많은 장모를 뵈러 처갓집을 방문한다. 또 그전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오페라나 필하모닉 연주회, 그녀 지인의 출판기념회에도 동반으로 참석해야 했다.

당초의 계약대로라면 두달반동안 5번만 서울 나들이를 했으면 될텐데 실제로는 10번쯤 간 것 같다.

아내는 소박해 보이지만 또 과시욕도 있었다. 신혼의 두달반동안 우리집에서는 6차례나 집들이 행사가 있었다. 그녀가 10여년 재직했던 서울 학교의 동료들, 그녀의 친구들, 처갓집 식구들, 새로 옮긴 강원도 산골의 교사들, ...... 그들은 우리의 사는 모습을 보며 이구동성으로 "야, 정말 멋진 전원생활을 하시는군요!"라고 하는데 바로 아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손님치레를 하게 되면 나도 행주치마를 걸치고 설겆이를 해야 했다.



하기야 설겆이는 이제 내 일상사의 하나가 되었다.

아내는 깔끔하고 부지런했다. 하루 일과를 청소로 시작하고 아침식사 후에는 설것이까지 마치고 출근했다. 퇴근 후에도 청소와 식사는 아내 몫이었다.

"집안 일을 다 내가 해낼 수 있어요. 하지만 하루 일을 끝내고 어질러진 집에 들어 온다는 것은 너무 싫어요."

한번은 아내가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후 나는 혼자 차려 먹은 점심 밥그릇이나 찻잔, 재떨이등을 설겆이해야 했고 아내의 퇴근무렵이면 휴지 하나 떨어진 것도 줏으며 집안을 점검하는 것이 생활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이런 나의 모습이 때로 서글프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비싼 크리스탈 그릇을 쓰려면 피할 수 없는 부담이기도 했다.

그래도 여러모로 재혼은 잘한 짓이다. 새로운 부담 이상으로 새로운 평안과 즐거움도 있다. 이제 각종 고지서가 귀찮지도 않고, 무얼 챙겨 먹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더구나 이 나이에 그다지 욕구가 일진 않지만 싱싱하고 고정된 섹스 파트너가 있다는 것까지 ......



사실 "두띠 동갑"이라는 젊은 여인과 사는데 남들의 호기심은 우리의 섹스생활에 집중되는 것 같았다.

형과 누나, 매형과 형수들까지도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다 어색한 웃음과 함께 "잘해줘?" 라느니, "동서가 불만은 없대요?"라는 식의 모호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모두 씹과 관련된 호기심인 것이다. 친구녀석들은 더 노골적이있다.

"영계를 품고 살더니 회춘이 되는지 신수가 훤하구나."

"여자는 30대 후반이 성욕의 정점이라는데 감당이 잘 되냐? 자네, 신경 많이 써야할 거야. 불만이 쌓이면 밖에서 터질 수도 있으니까 ......"

그 말들이 맞는 점도 많고 나도 신경이 많이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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