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발적인장모님


남자가 장가를 들었을 때 처제가 많으며 결혼한 언니나 동생과 사이가 좋지 아나하여 아무 이유 없이 언니나 동생에게 질투심이 나고 그 질투심으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게 제부나 형부에게 아양을 부려 덤으로 처제들과 재미를 보게 되기 시작하는 근친상간이 생각보다도 많이 생겼었고 생기고 있으며 생길 것이란 생각을 하는 것이 처제들이 많은 마누라와 결혼을 한 나만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흑심을 아니지만 친구들이 처제가 많아 좋겠다고 놀려대는 통에 나도 은근히 흑심이 생겼고 기대를 하고 결혼을 하였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기회가 생기려면 적어도 5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결혼을 하고 그 이유를 알았지만 마누라하고 처제들의 나이 차이는 아주 많아 나기 때문이다.


당시 28살의 나이로 늑대 같은 흑심을 가진(처음부터는 아니었고 친구들의 놀림으로 시작이 되었지만)나에게 시집을 온 내 마누라의 처제는 가장 나이가 많은 처제가 이제 겨우 중학교 이학년이고 둘째 처제는 아직 초등학교 교복도 벗지 못한 어린애이기에 애당초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확언을 할 자신이 있다.






결혼을 하고 안 사실이지만 처제들과 마누라 사이의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은 이유는 지금의 장모님이 내 마누라의 생모가 아니고 내 마누라의 생모는 내 마누라가 초등학교 졸업을 할 무렵 암으로 돌아가시고 재취를 들어와서 두 명의 딸을 낳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결혼 전에는 말 하지 않음, 이상한 점이 있었지만 생각도 않은 일이라 묻지도 않음)


그리고 장인어른도 내 마누라 나이 21살 때 생모를 따라 다시는 오지 못 할 길로 가버리고 말았고 내가 장모님하고(장모님은 장모님이지만 생모인줄 알았다는 뜻임) 세 자매가 오순도순 살았다.(?)






내가 마누라를 처음 만난 것은 삼 년 전 꼭 이맘때인 28살의 여름휴가의 계절이자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주머니 사정이 여유로웠다면 해운대나 강릉경포대해수욕장 아니면 거제도 자갈마당 등 물 좋은 곳으로 피서를 갔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물 좋은 곳에서 주로 노는 물 좋은 아가씨를 만나서 지금쯤 떵떵거리고 살지 알 수는 없을 일이지만 당시 어렵사리 입사를 하였던 신출내기 회사원의 주머니는 빈약하기 이루 말 할 수도 없을 때라 같은 처지의 친구들 4명과 뜻을 맞추어서 경기도의 맑은 물이 흐른다는 계곡으로 피서를 가게 된 것이다.






4명 중에 취업을 한 놈은 나뿐이고 나머지 세 녀석은 여전히 이력서하고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지만 당시에 취업하기가 아주 녹록하던 때였지만 운 좋게 취업은 하였지만 경기가 너무나 안 좋은 시기이고 또 신입사원이었기에 휴가비라고 해 봤자 쥐꼬리정도라 휴가비를 받은 그날 휴가 받은 기념으로 한잔을 하다 보니 거의 빈 봉투만 남은 꼴이었다.(여름휴가를 명목으로 매달 몇 푼씩 갹출을 하여 모은 돈이 없었으면 엄두도 내지 못 하였을 것임)






휴가를 가자고 하고 몇 푼씩 모은 돈이 있지만 휴가를 가서 충족하게 먹고 마실 그럴 여유는 없었다.


전 직원이 동시에 하지 못 하고 토요일과 일요일을 포함하여 4일씩 돌아가며 하는 회사의 방참 덕에 사용하고 난 후 씻어서 오겠다고 하여 텐트며 코펠 등 등산 용품도 회사 선배에게 빌려야 하였다.






4명의 건장한 젊은이들이 준비를 한 것이라고는 2Kg짜리 쌀 한 포대에 라면 20개들이 2BOX 소주 20병 들이 한 박스 반 즉 30병에 삼겹살 3Kg 쌈장 한 통에 자취를 하는 친구 녀석이 밑반찬 몇 가지와 하숙을 하는 녀석이 하숙집 주인 모르게 훔쳐온 김치 한 쪽이 3박 사일을 견뎌야 하는 전부였다.






그 분량이면 술 말고는 4명의 친구들이 하루면 바닥을 들어낼 정도의 양 밖에 안 되었다.


하지만 절약에 절약을 거듭하다가 그도 안 되면 우리처럼 여름휴가를 온 캠핑 족에게 시쳇말로 빈대를 붙을 그런 요량이었다.


그고 그럴 만 한 것이 친구들 중에 넉살이라고 하면 한 넉살을 하는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가 자신만 믿으라고 호언장담을 하였기에 나머지 셋은 그 녀석의 호기를 믿고서 거의 무작정 출발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






토요일 아침 일찍 출발을 하였다.


회사 선배에게 빌려 온 텐트를 친 결과 그 텐트는 4인용이라고는 하지만 건장한 남자 네 놈이 자기에는 턱 없이 좁았다.


거기다가 작열하는 태양을 가릴 것도 없는 아주 구형의 텐트였다.


나는 물론이고 친구들도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텐트를 걷고 철수를 할 수다 없었다.


우리들의 그런 난처한 모습을 다리 밑에 친 텐트 안에서 지켜보던 한 아주머니가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그 아주머니는 아이들과 남편 그리고 일가친척으로 보이는 일행들하고 같이 있었고 명문도 몰랐지만 해코지를 할 그런 분은 아닌 것 같아 조심스럽게 그 아주머니께 갔더니 자기들이 내일 아침 일직 철수를 할 것인데 자기들이 텐트를 친 자리를 눈독을 들이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켜보니 너무 딱해서 귀띔을 준다고 하면서 누구 한 사람이 자기들이 친 텐트 옆의 모래바닥에서 자고 있다가 자기들이 텐트를 철수 걷기 시작하면 얼른 짐의 일부를 자기들이 텐트를 걷은 자리에 가져다 놓고서 텐트를 걷어 와서 치면 편안하게 놀다 갈 것이라고 하였다.






냇가나 강가에 피서를 갔다 왔다면 다 알겠지만 다리 밑은 명당 중에 명당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도 시골 냇가의 다리는 높이도 낮아서 다리 난간 양쪽으로 햇빛 가리개만 한다면 최고의 요지라고 장담을 할 것이다.


4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한께 앉아서 밥이나 술을 먹기에도 부족한 구현 텐트에서 생활을 한다는 것은 피서가 아니라 곤욕을 치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명당자리를 얻게 되었느니 한 시름 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좁은 텐트 안팎으로 앉아 겨우 점심과 저녁을 해결하고 소주 파티를 한 후에 아주머니의 말대로 한 녀석이 다리 밑에서 죽치기 시작을 한 것이 아니라 네 녀석 중에 가장 등치가 좋은 녀석하고 넉살이 좋은 녀석이 거기서 잤다.






그 아주머니 일행은 그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철수 준비를 하였다.


두 녀석이 아예 딱 붙어 서서 도왔다.


아니 도운 것이 아니라 게걸스럽게 눌러 붙었다.


짐을 챙기면서 먹다 남은 음식이나 재료들은 집에 가져가 봐야 버린다고 아양 아닌 거의 구걸에 가깝게 한 덕에 그 아주머니 일행이 짐에는 먹을 것이라고는 뜯지 않은 과자나 통조림 등이 겨우 있고 뜯었지만 손도 안 된 재료들까지도 넉살이 좋은 녀석은 두고 가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한 덕에 편히 쉴 공간을 확보하였고 건장한 4명의 녀석들이 하루 정도는 더 버틸 수가 있을 정도의 양식도 학보가 되었다.


그런데 확보가 된 것이 하나가 더 있었습니다.


텐트를 치고 보니 텐트 안에 앉아서 밖을 보면 냇가를 사이에 둔 한 집이 한 채가 있었습니다.


마당이 아주 넓은 그 집은 언뜻 보기에는 별장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한 쪽에 장독이 있고 옥상에 빨랫줄이 있었으며 낮은 담장이 저진 가운데 난 대문에 문패가 붙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살림집이 분명하였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놀고 마시느라고 정신이 없어보였지만 나는 유독 그 집에 관심이 갔다.


몇 시간을 지켜 본 결과 엄마로 보이는 아줌마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애들은 그 아줌마의 딸로 보였지만 딸로 보이는 애들보다는 나이가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가씨로 추정이 되는 여자는 아줌마로 보이는 여자하고 어떤 관계일지 애매모호해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뜨자 대형 트럭의 타이어 튜브에 바람을 넣은 물놀이 기구를 가지고 초등학생으로 봤던 애들이 우리가 머무는 다리 근처의 냇가로 나와 물장구를 치고 놀았다.


두 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 애들의 엄마가 대문을 나와서 두리번거리더니 애들이 물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고 손짓을 하며 오라고 하였다.


애들 중에 작은 애가 손가락 하나를 펴고 들더니 한 시간만 더 놀다 가겠다고 하자 엄마가 다시 한 번 더 오라고 손짓을 하였지만 엄마의 부름에 대답은커녕 시선도 주지 않고 물놀이 삼매경을 빠져버렸고 엄마는 화가 난 표정으로 들어가더니 대문을 닫아버렸다.


오 분 정도가 지났을까.


애들의 언니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이모나 고모로 보기에도 어중간하다고 생각을 하였던 아가씨가 나타나더니 대문을 나서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가 있는 길을 지나 냇가의 둑에 서서 애 이름을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고 조금 전만하여도 엄마의 부름에 대답은커녕 시선도 주지 않고 물놀이 삼매경을 빠져버렸던 두 자매는 대답도 하지 않고 물놀이 기구를 들고 달려갔다.






두 여자애들이 다시 냇가에 모습을 보인 것은 삼십 분 후였다.


미끈하게 잘 빠진 아가씨에게 관심이 생긴 나는 그 애들에게 접근을 하였다.


걔들이 가지고 노는 타이어 튜브는 둘이 올라타고도 남을 그런 크기였으나 밀어 줄 사람이 없기에 언니가 타소 물을 저으면 동생이 개헤엄을 치며 밀어주었고 동생이 타면 언니가 교대로 밀어주며 놀았다.


난 두 아이들에게 함께 타라고 밀어주며 가까워지려고 하였다.


집도 지척에 있고 냇가에서 보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은 인식하였던지 거리감을 주지 않고 나에게 다정하게 굴었다.


작은 애의 경우 번쩍 들어서 튜브에 올려주어도 별다른 거부감을 가지지 안하였으나 큰 애는 그래도 컸답시고 처음에는 스스로 타겠다고 하였고 조금 가까졌다 싶어서 내가 몸에 손을 대면 거북 해 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화가 거듭하자 아예 몸을 맡기며 들어 올려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두 시간 정도 놀다가 엄마가 부르자 가면서 나에게 손은 흔들어 주기까지 하였다.






저녁이 되어 저녁을 먹고 소주 파티를 하면서 가지고 간 기타를 치자 주변에 피서를 온 사람들이 하나 들 모이기 시작하였고 누가 가지고 왔고 누가 피웠는지는 모르지만 제법 낭만이 있는 켐프 파이어가 가운데 있는 가운데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우리 네 명을 기준으로 둥그런 원의 형태를 갖추었고 노래를 부르면서 둘러보니 같이 물놀이를 하던 두 자매와 그들과의 관계가 아리송하다고 생각한 아가씨도 나란히 앉아서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게 지금의 마누라와 처음 만나는 순간의 묘사이고 아주 정확한 사실이다.






냇가로 피서를 온 피서객들은 시간이 지나자 하나 둘 사라졌고 거의 열 시가 넘어가자 남은 사람은 나와 넉살이 좋은 내 친구 그리고 두 자매와 그들과의 관계가 아리송하다고 생각한 아가씨가 전부였다.


작은 애가 나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넉살 좋은 녀석이 우리가 사는 곳을 이야기를 하더니 시키지도 않은 자기소개부터 하고는 같이 놀러 온 친구들 중에 직장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 나라고 하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아가씨가 나에게 직장이 이디냐고 물었고 난 다니던 회사 이름을 이야기하자 그 아가씨는 반색을 하며 우리 화사 위치를 말하더니 자기도 우리 회사 근처에 있는 큰 회사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름은 있는 화장품 회사에서 신규 화장품 개발 하는 팀에서 근무를 하며 자기도 휴가를 받아 집에 와 쉬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서로의 신상을 알기 된 그녀와 나 아니 우리 일행과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두 계집애들과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지만 언니라는 것까지는 알았지만 그 이유에 대하여서는 혹시 실례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묻지 않았다.


그녀도 나에게 은근히 관심을 보였지만 나도 관심이 갔다.


그렇게 되고 보니 먹는 것에 대하여서는 적어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아가씨가 문제가 아니라 그 아가씨의 나이 어린 동생들이 집에서 갖가지 음식들을 퍼 날라 준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 한 점은 엄마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지만 그 아가씨는 신경질적으로 대하였고 엄마라는 아줌마는 아가씨가 신경질적으로 대하여도 아무 말도 하지 못 하였다.


뭐랄까 그래 마치 고양이 앞의 쥐나 다름없었다.


대신 동생들에게는 상상 이상으로 다정다감하였다.


무슨 잘 못 된 행동을 하더라고 바로 꾸짖는 경우가 없이 한두 번 이상 경고를 하여도 같은 행동이 반복이 되면 그때서야 혼찌검을 내었다.


하여간 3박4일의 피서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거기다가 아가씨와 연락처를 주고받은 나의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꿩 먹고 날 먹은 겪이나 진배가 없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서로 연락을 하였고 직장이 가깝다 보니 이틀에 한 번 이상 만나서 식사도 하고 술도 마셨다.


피서를 다녀오고 이주일 아니 월요일부터 그 다음 주 금요일까지 무려 5번은 만났고 두 번째 주 금요일 저녁에 만나서는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별일이 없다면 자기 고향 집으로 가서 놀다오자는 제안까지 받았다.


그렇게 급속히 발라진 그녀와 나의 관계는 8월이 지나기 전에 이미 결혼을 전제로 몸을 섞은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나 그녀의 동생들 그리고 심지어 엄마라고 하는 장모님이 될 분도 장인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장모님이 될 분의 경우 뭔가 나에게 하고 싶어 하는 말이 있어 보였지만 내 마누라가 될 여자의 눈치를 모느라고 하고 싶은 말도 차마 하지 못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하는 사이 양가에서는(양가라고 하지만 여자의 집에서는 마누라가 결정을 하면 장모님이 될 분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정도였음)본격적으로 혼례 문제가 논의가 되었고 결혼식 날짜를 처갓집에서 받아서(실은 이도 마누라가 철학관에 혼자 가서 받은 것으로 나중에 밝혀짐)우리 부모님에게 줌으로서 우리는 하나의 부부가 되었다.






신혼집은 마누라의 회사와 우리 회사가 있는 동네에다가 차렸다.


시가 식구며 산랑 친구들을 불러서 집들이를 하였고 마누라 친구들을 불러서 집들이를 하였으며 마지막으로 마누라 식구들 즉 처갓집 식구들을 불러서 집들이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지만 마누라는 자기 친정 식구들에 대한 집들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처갓집 식구들과 집들이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나의 말은 급기야 부부싸움으로까지 비화가 될 정도로 마누라는 친정식구들에 대한 이야기에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 후로 나의 입에서 먼저 처갓집에 대한 이야기를 발설을 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처갓집에 가더라도 마누라는 내 옆에 거의 밀착을 하다 시피 하였기에 장모님하고 처제들하고 이야기를 거의 할 수가 없었다.


한다고 해 봐야 마누라가 곁에 있기에 통상적인 이야기만 겨우 할 뿐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여 처갓집 식구들 즉 장모님하고 두 명의 어린 처제들하고 인간적이 대화가 가끔은 하고 싶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마누라의 친정 식구들에 대한 님감한 반응은 나로 하여금 처갓집 식구들과 가깝게 하게 하지 못 하였고 갈수록 거리감만 생겼다.


어쩌다가 혼자 쉬는 날이라도 있으며 몰래 처갓집에 가보려고도 마음을 먹었지만 같이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쉬고 명절도 쉬는 날이 같기에 따로 쉬는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다.






금년 봄 마침내 기회가 생겼다.


마누라가 근무를 하는 화장품 회사의 개발팀에서 독자적으로 개발을 한 화장품의 판매 실적이 점차 좋아지자 회사는 격려 차원에서 개발팀에서 근무를 하는 직원들 중에 그 화장품의 개발에 적극 참여를 한 직원 4명 전원에게 프랑스 연수 기회를 일주일간 주기로 하였고 거기에 마누라가 포함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회를 기다린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장모님이 나보다도 더 절실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마누라가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을 한 이튿날(마침 출국을 한 날이 금요일 저녁이었음)아침에 눈을 뜨고 휴대폰을 보니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영미 어제 출국했지. 오후2시에 시간 있으면 00시 시청 앞으로 나올 수 있어?>라고 말이다.


문자를 보낸 사람의 휴대폰 번호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마누라를 금요일 저녁에 인천국제공항에 태워다 주고 오면서 이튿날 아침을 먹고 전화를 걸려고 하였던 장본인이 장모님의 휴대폰 번호였으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한 번 신호가 가는가 싶었는데 바로 끊어버렸다.


어이가 없었다.


순간 다시 문자가 왔다는 신호음이 들렸다.


<전화 걸지 마 애들 있어>장모임이 처제들도 모르게 사위인 나와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2시까지 갑니다>간단하게 문자를 보냈다.






“큰일 났어. 흙탕물을 뒤집어썼어!”시청 앞에다가 차를 파킹을 하고 기다리는데 장모님이 나타나더니 울상을 지으며 말하였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셨어요?”차에서 나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흙탕물에 젖은 치마를 보자


“이거 입고 어디도 못 가겠어. 조용한 곳으로 일단 가”하고는 나의 대답도 듣지 않고 내 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갈까요?”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시동을 걸고 천천히 움직이자


“일단 직진 해”하고는 얼굴을 앞창에 바짝 붙이고 밖을 보더니


“저기에 들어가 저기 세탁소 있지”모텔을 가리키기에 놀라 섰더니 고개를 돌려 뒷 창으로 보고는 세탁소 간판을 가리켰다.


“예. 장모님”하고 대답은 하였지만 들어가자고 하는 것이 다른 곳도 아니고 모텔이라 난감하였다.


“어서 들어가 속옷도 젖겠어.”속옷도 젖는 다는 말이 난감해 할 여유도 없이 난 차를 모텔 주차장 안으로 넣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보고 와”모텔 알으로 들어가자마자 장모님이 욕실로 들어갔고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를 몰라서 우왕좌왕하는데 욕실 문이 열리더니 장모님의 머리와 옷을 든 손만 보였고 손에 든 옷을 나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예"하고 대답을 하고 난 장모님의 흙탕물이 묻은 옷을 들고 모텔을 빠져나와 모텔 바로 옆에 있던 세탁소에 맡기고는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고 망설이는데 마침 장모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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