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 8부

어둠이 내려앉은 종로거리의 음식점 안에서 재용과 상민, 그리고 미나가 구멍탄불이 이글거리는 원탁에 둘러 앉아 있었다. 구멍탄불 위에는 삼겹살이 연기를 피우며 익혀지고 있었다. 술 몇 잔에 취기가 올라 기분이 좋아진 재용이 불쑥 상민에게 물었다.

“상민아! 그 날 재미있었지? 하하~!”
“재미있기는 뭐.....!? 그 여자들 이상하던데.”
“이상하던 말든 즐거우면 됐지. 뭐! 하하하.......”

불에 타고 있는 고기를 옮겨놓는 미나가 재용을 힐끔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을 의식하고 나서 재용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것을 알고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여자들에 관한 말에 동그랗게 눈을 뜬 미나가 상민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어디 갔었는데?”
“오래간만에 클럽에 갔었지.”

변명을 하면 더욱 이상하기에 재용이 넙죽 대답을 하며 히죽거리며 웃었다. 호감을 느끼고 있는 상민도 같이 어울렸다는 것에 민감해진 미나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거기서 아는 여자들을 만난거야?”
“아니, 놀러와 있던 여자들이 합석하자고 한 거야.”

쑥스러워진 상민이 변명을 했다. 그는 마치 다른 여자를 만나다가 애인에게 들킨 사람처럼 미나의 시선을 피했다. 미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남자들은 모두 똑같아. 상민씨도 그런데 좋아하는구나.”
“아냐! 정말 그냥 술 취한 여자들이였어,”
“그런데, 재미있었다면서.........?”
“그 여자들이 술주정을 하는 모습이 웃겼다는 거지. 우리는 금방 나왔어.”

“피 잇~! 상민씨도 못 믿겠네.”
“못 믿는다는데 어떡해? 어쩔 수 없지.”

미나가 상민을 향해 곱게 눈을 흘겼다. 미나의 모습을 보고 재용은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여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재용도 미나가 상민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나가 묻지 않아도 상민과 만날 때는 알려주곤 했다. 재용은 괜히 클럽에 갔던 말을 꺼냈다고 생각하여 화제를 돌렸다.

“창식이 선배 서예실력이 늘었던데. 우리는 언제 출품해보지?”
“그 선배 아버지가 서예가이잖아. 아버지에게 어렸을 때부터 배웠으니까 그렇지.”

새침했던 미나가 밝은 표정으로 재용의 말에 대답을 했다. 그들은 이내 동아리 회원들의 얘기와 서예전에서 보았던 작품에 대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대화 도중에 미나는 상민의 접시에 익은 고기를 담아주기도 하며 섬세한 모습을 보였다. 대화 도중에 미나가 불쑥 물었다.

“우리 언니 결혼식에 올 거야?”
“아! 맞아. 이번 주 토요일에 미나 언니 결혼식이라고 했지.”
“이번 주 토요일이었던가!?”

잊었던 일을 생각한 재용이 젓가락으로 탁자를 쳤다. 상민 역시 잊고 있었기에 미나에게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미나는 같은 학과인 재용보다 상민이 서운했다. 그만큼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미나는 상민에게 눈을 흘겼다. 젊음은 두려움보다는 패기와 낭만으로 이상에 도전한다. 또한 우정과 사랑에 풍성한 감정을 지닌 인생의 황금기이다.

주말 토요일에 상민은 약속대로 미나 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미나 부모가 교수여서 학계의 많은 축하객들이 예식장에 있었다. 상민의 캠퍼스 친구들과 동아리 선후배들의 모습도 보였다. 미나가 상민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하느라 그녀는 평소와 달리 옷차림에 신경을 쓴 모습이었는데 한결 성숙해 보였다. 미나가 상민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언니 소개 시켜줄게”
“지금 바쁠 텐데. 나까지.......”
“하여튼 와봐.”
“.........!?”

상민은 마지못해 미나에게 끌려 신부대기실로 들어갔다. 대기실에는 드레스를 입은 미나 언니 미정과 미정의 친구 연주가 있었다. 신부화장을 하고 어깨를 들어낸 드레스를 걸친 미정의 모습이 화사하게 보였다. 얼떨떨한 상민이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주춤거렸다. 미나가 활짝 웃으며 미정에게 상민을 소개했다.

“언니! 내 친구야.”
“강상민입니다.”

겸연쩍은 상민이 미정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미정과 연주가 상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환한 미소를 흘리는 미정이 긴 속눈썹을 껌벅이며 말했다.

“어서 와요. 멋진 남자 친구네. 그런데 남자친구니 애인이니?”
“호호~! 언니 멋대로 생각해.”
“도도하게 굴더니 미나도 남자 친구가 있구나.”
“언니는!? 내가 무슨.........”

미나는 새침한 표정으로 미정에게 눈을 흘겼다. 그때 대화를 하느라고 상민의 등 뒤에 있는 대기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모두들 모르고 있었다. 미정은 미나의 새침해지는 표정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했다. 그리고 상민에게 물었다.

“미나가 무척 속 썩일 텐데?”
“글쎄요....... 별로 그런 건 모르겠는데요.”
“그럼, 미나가 남자친구에게 단단히 반했나보네. 그런 성격이 아닌데.”
“언니!”

미정의 핀잔에 미나가 와락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공연히 상민의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상민을 바라보는 미나의 얼굴에 부끄러움과 애교가 넘쳤다. 미정의 시선이 상민의 등 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은 미정의 다른 친구였다. 미정이 반가운 표정으로 문 쪽을 향해 손을 뻗쳤다.

“지영이구나. 와줘서 고맙다.”
“어머! 미정이. 너, 신부 화장하니 너무 예쁘다. 연주도 와 있었구나.”
“응. 반갑다. 그런데 지영이 너는 시집도 안가니? 너만 남았다.”
“연주, 너는 시집 간지 얼마 됐다고, 그런 말 하냐.”

“호호호~!”
“호호........”

미정과 연주, 그리고 지영이 서로 바라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들을 빤히 바라보던 상민의 눈빛이 반짝였다. 지영! 그녀는 상민이 언젠가 보았던 지선의 동생이었다. 상민의 시선을 느낀 지영이 마주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넌.......!?”
“안녕.......하세요.”

상민이 자신을 알아보는 지영에게 더듬거리며 인사를 했다. 미나가 상민과 지영을 번갈아 보았다. 미정도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지영에게 물었다.

“두 사람 아는 사이니?”
“응.......! 우리언니 시댁 조카.”
“호호~! 세상은 넓고도 좁구나.”
“글쎄 말이야. 호호호.......”

그녀들은 마주보고 웃었다. 그리고 친구들의 근황에 대해 묻고 답하며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상민과 미나는 잠시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미나가 자잘한 미소로 상민 손을 잡아끌었다.

“상민씨! 우린 나가자.”
“음, 그래.......”

그녀들이 대화를 중단하고 상민과 미나를 쳐다봤다. 상민은 목례를 하고 미나를 따라서 신부대기실을 나왔다. 지영이 상민과 미나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대기실을 나온 미나가 상큼한 표정으로 상민에게 물었다.

“우리 언니 예쁘지?”
“미나하고는 조금 다른데.”
“왜, 내가 어때서?”
“하하~! 귀여운 못난이.”

“피 잇~! 다른 사람은 언니보다 내가 더 예쁘다고 하던데.”
“하하하........”

미나가 상민에게 하얗게 눈을 흘겼다. 예식장 입구는 더욱 축하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남녀노소 모두들 나름대로 옷을 차려입고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하며 덕담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흥겨운 표정으로 축하객 무리 사이를 헤치고 예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으로는 항상 바다가 보였다. 지선은 커피 한잔을 들고 바다가 보이는 창문을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침묵의 시간 속에 머물고 있는 그녀는 누군가와 하고 싶은 얘기를 바다와 하고 있다. 바다는 언제나 시작도 없었으니 끝도 없다. 지선은 파도가 밀려오는 수평선의 외로운 섬과 자신이 아무래도 남남 같지 않은 인연이 있음직해 보였다.

먼 길을 달려온 파도가 암초에 부딪쳐 만드는 물거품처럼 지선의 가슴속에는 항상 고독함이 거품처럼 일어나 있었다. 시계추처럼 집을 드나드는 남편에게 감정도 감각도 없이 허수아비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물론 포항으로 내려온 남편은 피곤함도 잊고 새로운 삶의 희망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그녀는 현실을 당당하게 대할 수도 없고 그저 지워버려야 할 기억을 가슴속에 안고 상처의 아픔을 달랠 뿐이었다.

멀지 않아 바캉스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부둣가에 모습을 나타낼 계절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커피가 그녀의 마음처럼 식어가고 있다. 지선이 커피 한 모금을 훌쩍 들이키는데 현관의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 시간에 찾아 올 사람이 없기에 지선은 액정화면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모처럼만에 지선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화면에 나타난 사람은 한 동안 연락이 없던 그녀의 여동생 지영의 모습이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지영의 목소리가 멜로디처럼 들렸다.

“언니! 놀랬지?”
“연락도 없이 웬일이니?”

“내가 반갑지도 않은가봐.”
“들어와.”

지선의 담담한 표정에 지영은 새침해졌다. 거실에는 걸음을 배우기 시작한 송이가 뒤뚱거리며 걷다가 기어갔다. 지영이 얼른 송이를 들어서 안고 소파에 앉았다. 지영을 마주하고 앉은 지선이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웬일로 온 거니?”
“언니는! 내가 꼭 이유가 있어서 와야 돼나. 엄마가 소식도 없다고 걱정하시더라고.”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뭐........”
“그래 요즘 어떻게 지내?”

“어떻게는........!?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지.”
“형부가 잘 해주지 않는가보구나?”
“.........!”
“그런데도 뱃살이 쪘나봐.”
“.........!”

동생의 말에 지선은 흠칫하였다. 아직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떤 대책도 없지만 무작정 상민의 아기를 낳기로 결심한 그녀였다. 그리고 남편이 무엇을 잘해주는지, 남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 그녀는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지영은 아버지가 허리가 좋지 않아서 병원에 다녀왔고 어머니가 지선을 한번 다녀가라는 등의 집안 식구 얘기를 했다. 그리고 지영이 지나치는 말로 상민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 지선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언니, 그리고 말이야. 언니가 데리고 있던 그 시댁 조카 상민을 예식장에서 봤어.”
“..........!?”
“더 멀쑥해졌더군. 친구 결혼식인데, 그 친구의 여동생의 애인인가 봐, 무척 다정해 보이고 더라고.”
“..........!”
“세상은 정말 좁은 거 같아. 거기서 상민을 만날 줄이야!”
“.........”

흘려듣는 것처럼 무관심한 지선의 표정이지만 지영의 말에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은 상민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생각에 좌절감이 들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정이었고 지선 자신도 잊으려고 노력했으면서도 막상 소식을 들으니 심장을 바늘로 찌르는 것보다 더한 아픔이 스며들었다. 그래도 상민에 대한 애정은 끈질기게 남아 그녀를 고통스럽게 한다.

자괴감에 젖은 지선은 갈매기가 날고 잇는 항구와 바다가 보이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기대할 수 없었던 희망의 연줄이 끊어져 바다바람에 날아가는 허망함에 젖었다. 지선이 바라보고 있는 항구의 건물 중에는 남편의 직장도 있었다.

거대한 철골과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선박을 제조하는 큰 공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공장들 앞의 선착장에는 제조중이거나 수리중인 유조선들이 철골을 들어내고 있었다. 경호는 유조선의 철골위에 앉아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뿜었다. 뿜어내는 하얀 담배 연기마다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바닷바람에 날려 사라져갔다.

한숨을 내쉬는 경호는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경호 나름대로 사랑을 표시하려는 아내 앞에서는 희망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아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결과 때문에 요즘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내에 대한 문제로 고통스러워 피우지 않던 담배도 요즘 그는 피우고 있었다.

아내의 생명력을 잃은 생활과는 달리 경호는 무능할 수밖에 없는 지난 시간을 다시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아내의 우울증도 자신의 탓이라고 받아 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그는 아내를 조금씩 의심을 하게 되고, 그 의심이 확인되는 결과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 부부관계를 거부하는 아내이지만, 경호는 힘든 생활에 스트레스를 받아 그런 줄 알았다. 그리고 자궁에 염증이 났다는 것도 그는 이해를 할 수가 있었다.

자재과 책임자로 발령 받았다고 하지만 선박까지 자재를 직접 운반하고 때로는 현장지원을 하는 막노동까지 해야 하는 고달픈 직책이었다. 회사 말로는 노조와 인건비관계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항상 지쳐서 귀가하는 경호도 피곤하여 부부관계를 하고 싶지도 않지만 아내가 너무 긴 시간동안 치료를 받는다는 것도 의심이 갔다.

그런데 일주일 전에 업무 때문에 시내로 나갔다가 우연히 아내를 발견했다. 점심이라도 같이 하려는 반가움에 다가가던 경호는 멈추어 섰다. 아내가 산부인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잘못하면 아내의 뒤를 미행했다는 오해를 받기 싫어 그는 기다렸다. 병원에서 나오는 아내에게 다가가려던 경호는 멈칫했다. 아내의 배가 점점 불러 오는 것 같았으나 마음이 편해져 살이 찌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경호는 문득 의아심이 들었다.

아내를 만나려던 경호는 몸을 숨겼다가 병원으로 들어갔다. 간호사에게 아내를 만나기로 했는데 늦었다고 하였다. 아내의 건강이 걱정이 돼서 그러니 진료기록을 보자고 하였다. 그런데 뜻밖으로 아내와 아기는 건강하다는 것이었다. 경호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고 간호사가 이상하다는 눈빛을 하였다.

그날 경호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내가 임신했다면 기뻐해야하건만 좌절감을 느낀 그는 병원입구의 계단에 주저앉았다. 아내가 자신의 아기를 임신할 수 없다는 것을 그만이 알고 있었다. 성격이 무뚝뚝한 탓도 있지만 아내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성적인 열등감을 느꼈던 그였다. 예비군 교육장에서 동료들이 정관수술을 받으면 정력이 강화된다는 말에 수술을 받았었다.

물론 수술 후에도 임신 가능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경호는 아내와 부부관계를 한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결국 경호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기를 임신했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외도를 했다는 사실을 경호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는 아내와 이혼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누구에게도 의논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경호는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싶었다. 부모에게도 의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모가 사실을 알게 되고 아내와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하는 결과가 그는 두려웠다. 어떤 해결도 할 수없는 그는 며칠 동안 혼자만의 고통스러움에 빠져 있었다.

아내에 대한 배신감에 대한 분노가 이글거리는 경호는 피우고 있던 담배꽁초를 바다에 힘껏 던졌다. 그는 파도치는 바다로 뛰어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긴 한 숨을 내쉬던 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갑판 꼭대기에서 작업하던 반장의 고함소리였다.

“그러고 있지 말고, 자재를 가져다 줘야 일을 끝낼 거 아냐!”
“.........”

재촉하는 반장의 목소리에 경호는 부스스 일어나서 철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부하직원이 두 명이 있지만 어디에서 일하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자멸감에 젖은 경호는 일을 하기도 싫었다. 단지 그는 넋을 잃고 반사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철 계단을 내려오는 그의 발걸음이 뒤뚱거렸다. 창고로 가서 자재 상자를 짊어진 그는 다시 선조중인 유조선을 올라갔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선박에 오른 경호는 작업반장이 일하고 있는 꼭대기를 쳐다보았다. 불같이 달아오른 태양에 눈이 부시고 현기증이 났다. 그는 다시 높은 철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어깨에 짊어진 자재상자가 흔들려서 그는 휘청거렸다. 간신히 발걸음을 한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을 옮기던 경호는 아차 싶었다.

철 사다리 밑으로 그의 발이 빠진 것이었다. 어깨에 메고 있던 자재상자가 미끄러져 내리려 했다. 흘러내리는 자재 상자를 엉겁결에 붙잡으려던 그의 몸이 균형을 잃고 밑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의 몸이 높은 철 사다리에서 추락해 내리면서 갑판의 철골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요란한 소리를 냈다.

“뭐야.........!?”
“무슨 소리지?”

선박위에서 일하고 있던 작업반 요원들이 갑판을 내려다보고 놀라서 허겁지겁 내려오기 시작했다. 철골 무더기에 틀어박힌 경호의 머리와 가슴에서는 선혈이 분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갑판위로 작업반원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들었다. 작업반장은 황급히 무전기로 사무실에 긴급 상황을 통보하고, 작업반원들은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했다.

거칠게 밀려온 파도는 추억의 아픔을 남겨놓고 흔적도 없이 밀려 나가기를 반복한다. 출렁이는 파도 위로 갈매기들이 애달픈 목소리를 흘리며 선회를 한다. 잠든 송이를 안은 지선은 넋을 놓고 창문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동생이 다녀가면서 남긴 말을 되새겼다.

“언니! 이렇게 살 것을 왜 결혼했어? 언니 같은 모습되기 싫고, 정말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면 나는 결혼 안할 거야. 하지만....... 산다는 것이 별 겻인가. 이왕 결혼해서 사는 건데, 힘을 좀 내라고.”
“사랑.......!?”

지선은 과연 자신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사람이 누구였던가를 되돌아 봤다. 아무리 떠올려 봐도 남편은 아니었다. 부모님 말고 그녀가 떠올릴 사람은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을 잉태할 수 있었던 상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상민을 잊으려하면서도 아기를 낳으려고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상민이 사랑의 증표로 백화점에서 구해주었던 것이었다. 목걸이를 볼 때마다 상처가 들어나는 것 같아서 몇 번인가 없애 버리려고 하던 그녀는 언젠가 뱃속에 아기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창문으로 시선을 두고 있던 지선은 전화 벨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송이네 집인데요.”
“박경호씨 댁이지요?”
“네, 제가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만........”
“저는 회사의 인사과장입니다. 급한 일로 연락 드렸는데, 남편께서 사고를 당해 해운병원 응급실에 있습니다.”

“네!? 뭐라고요.........?”
“남편께서 응급실에 있는데, 생명이 위급합니다.”
“뭐, 뭐라고요........?”
“생명이 위급하니 와 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지선은 상대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깊은 정 없이 살고 있어도 그녀의 남편이었다. 위급상황을 반복해서 알리는 말소리가 들리는 수화기를 들고 있는 지선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수화기를 놓치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무의미한 생활을 하고 있어도 남편은 송이의 아버지였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남편에게 의지하여 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소복을 한 지선은 장례식장의 외진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예식장 안에는 친정 부모와 시댁부모들, 그리고 식구들이 분주하게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가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남편은 숨을 거둔 후였다. 남편의 죽음은 정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지난 며칠간을 그녀는 물 한 모급 제대로 마시지 못하면서 무슨 정신으로 지탱했는지도 모른다.

아침에 침울한 표정으로 집을 나가던 남편의 모습이 지선에게 마지막이었다. 남편의 죽음을 맞이하는 그녀의 마음은 공허하기만 했다. 그녀는 이제 와서 말 한마디 안 남기고 떠나간 남편을 야속하게 생각하고 원망스러워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책상에서 낙서하듯이 휘갈겨 쓴 메모장을 보았다. 정관수술, 아내의 임신, 아내의 행복, 나의 불행 등의 단어를 보고 지선은 남편도 임신한 사실을 눈치 챘다는 것을 알았다.

상민의 아기를 임신한 것이 어쩌면 남편을 죽음으로 몰았을 것이라는 자책감에 지선은 실끈같이 잡고 있던 삶의 의욕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포항으로 내려오면서 희망으로 가득했던 남편의 얼굴이 떠 올리는 지선은 현기증을 느꼈다. 벽에 기대 한 숨을 내쉬는 그녀가 있는 골방으로 송이가 기어서 들어왔다. 뒤따라 오십이 넘은 지선의 큰시누이가 쫓아 들어왔다.

“어이구! 불쌍한 송이! 엄마 힘들게 하려고 그러지.”

송이를 안은 시누이가 지선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리고 지선의 동생인 지영이도 방으로 들어왔다. 그 시누이는 바로 남편의 큰 누나이고 상민의 어머니였다. 지영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지선을 바라보며 방문 앞에 앉았다. 시누이가 지선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떡해! 죽은 내동생도 안타깝지만, 올케가 힘을 내야지. 운명은 재천이라는데.”
“..........”
“못난 놈! 유복자나 만들지 말고 죽을 것이지.........”
“.........”

벽을 응시하고 있는 지선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시누이가 흐느껴 울기 시작하고 지영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옷깃으로 닦아냈다. 시누이의 유복자라는 말에 지선은 울컥하고 설움이 북받쳤다.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생명이기에 지선의 상처를 도려내는 슬픔이었다. 그녀를 더욱 가슴 아프게 하는 말은 시누이의 말이었다.

“올케는 아직 젊으니까, 용기를 가져. 우리 올케같이 착한 여자도 없을 거야. 시집식구들한테 싹싹하고, 남편에게 다소곳하며, 조신하다고 칭찬받는 여자가 어디 흔한가......”
“...........”
“지금 교환학생으로 독일에 가서 못 왔지만, 상민이도 외숙모가 잘해줘서 항상 고맙다고 했었지. 상민이도 올케 같은 여자를 만나야 하는데......”
“..........!?”

상민에 관한 말에 긴장한 지선은 흠칫하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불쑥 솟아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시누이나 지영에게 자신의 표정이 들어나지 않았는지 지선은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그렇지 않아도 상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실망스러웠다. 물론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야하기에 인연이 아니고 포기했다고 지선은 생각했었다. 그러나 상민에 대한 열정의 불씨는 그녀의 가슴속에 꺼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남편의 장례를 마친 후 지선은 삶과 애정에 대한 갈등 속에 한 달을 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배가 부른 상태에서 다시 이삿짐을 꾸리고 있었다. 어차피 남편과의 삶도 행복하지 못했고 이룰 수 없는 상민과의 사랑에 상처를 지우고 그녀는 혼자만의 삶이라도 작은 행복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죽은 남편의 영혼이 있는 포항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회사에서 나온 위로금과 보험금으로 작은 점포라도 운영하면서 꿋꿋하게 살고 싶은 소망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남편이 죽으면서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지선은 생각했다. 송이는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조용하게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녀가 바쁘게 움직이는데 현관의 차임벨이 울렸다. 모니터를 들여다 본 그녀는 이삿짐센터에서 온 것을 확인하고 현관 스위치를 눌렀다.

시계바늘은 인간의 운명과는 관계없이 규칙적으로 움직인다. 세월은 가라고 하지 않아도 흘러가고 다시 똑같은 계절을 반복해서 맞이한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이 물러가고 짙푸르렀던 가로수에서 낙엽이 떨어지고 있다. 하얀 구름이 떠있는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공항 주위를 돌던 항공기가 활주로에 미끄러져 내려왔다.

독일에서 출발했던 항공기에 탑승했던 승객들이 입국절차를 받고 입국장으로 몰려 나왔다. 대합실에는 입국하는 승객들을 맞이하려는 가족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승객들을 마중 나온 가족들의 어깨너머로 무척 귀여운 얼굴의 여대생이 발 돋음을 하고 입국장을 살폈다. 그녀는 상민의 귀국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미나였다.

“상민씨! 여기야. 여기.”

환한 미소를 흘린 미나는 입국장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가방을 끌고 나오던 청년이 미나를 발견하고 반가운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짧은 머리에 깔끔한 모습으로 나오는 청년은 교환학생으로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는 상민이었다. 상민은 이따금 미나와 편지로 안부를 묻거나 국제전화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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